엘레나 페란테,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나폴리 4부작 제 2권
아직도 이 작가를 이제야 읽어보는 중이라는 사실이 조금은 억울하다. 영어와 다른 덕질을 위해 책 욕심을 잠시 꺼두었는데 이런 대작이 수입되다니. 영어권 작가가 아니라 원서 사재기를 하던 3년 전까지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영어권 작가인 올리비아 랭이나 비비언 고닉도 비슷한 시기에 알게 되어 비슷한 시기에 읽고 있는 것에 비하면 때마침 영어 컴플렉스를 극복하고 스토리 욕구에 충실해진 것이 다행일까? 멋있는 언니들의 책은 한국어로 읽어둔 덕분에 빠르게 따라잡는 중이다. 영어판도 번역서이므로 별 고민없이 한국어판을 읽고 있는 엘레나 페란테는 아마도 전용 책장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랭과 고닉을 포함한 다른 인생 작가들은 내 마음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지만, 엘레나 페란테는 독보적이다.
이미 내 사랑, 이기도 한 릴라가 결혼을 했다. 일면 고구마일수도 있는 외도와 가출도 릴라가 하면 다르다. 그 대상이 스포일러이면서 스포일러가 아니기도 하지만 굳이 밝히지는 않겠다. 나쁜 놈. 그런데 당연하게도 남편은 더 나쁜 놈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에서 남편들은 당연히 나쁜 놈이어야 한다.
현실감이 높은 스토리이기도 하지만 스토리의 핵심 요소인 주인공의 '시련'을 담당해야 하기에. 서술자인 레누를 기준으로는 엄마가 나쁜 맘이고 그 엄마의 남편은 안 나쁜 놈일 확률이 높지만? 공부하는 레누의 시련은 친어머니와 절친 릴라를 포함해 질투하는 여성들, 조혼하는 릴라의 시련은 그녀를 가부장제 부품으로 활용하는 본가의 남성 구성원, 자신이 낳은 아들을 포함한 시가의 모든 사람, 그녀를 갖지 못한 동네 오빠들과 그로 인해 딸려오는 질투하는 여성들이다. 숨은 시련인 레누를 포함해, 말아?
이처럼 뻔할 것 같은 이야기인데도 엘레나 페란테는 끝없는 스릴과 생생한 묘사와 마법같은 언어의 변주로 사람을 홀린다. 이건 우리가 레누를 의심하면서도 레누에게 과몰입을 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레누는 릴라를 사랑하지만 릴라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마음보다 질투가 1%쯤 크다. 레누는 릴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지만 때때로, 아니 가면 갈수록 릴라도 그만큼 레누 자신을 의식하고 있다는 걸 발견한다. 결국 서로가 서로를 자극하고 있던 것이다.
클리셰에 가까운 인물들의 관계는 또다른 매력이 있다. 자주 접하지 못하는 이탈리아, 그것도 나폴리라는 배경의 신선함과 '어딜 가도 등장하는' 빌런들의 조합은 이국적인 낭만인 동시에 예상하기 어려운 위험요소다. 거두절미하고 이탈리아 마피아는 나도 처음이다. 이탈리아 영화조차 거의 본 적이 없기에 내가 아는 이탈리아 사람은 <크리미널 마인드>의 데이비드 로시와 돌아가신 예술가들 정도. 이렇게 보면 러시아가 오히려 친척일세.
배경이 나폴리인 만큼 피자와 아이스크림이 엄청 나온다.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에 피자는 더 많이 나오지만 그건 스웨덴 편의점 냉동피자. 나폴리 화덕에서 갓 구운 피자가 등장하면, '화덕'을 검색하게 된다. 젤라또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이후로 안 먹어서 맛을 잊어버린데다 편의점 아이스크림은 지난주에도 먹었으니 그립진 않고.
해변의 휴양지는 글로 읽어도 청량하다. 현지인들만 아는 핫플이 있을까? 매년 이탈리아로 몰려오는 관광객을 생각하면, 끝없는 백사장이나 투명하게 부서지는 파도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미지의 지중해를 상상하면 간질간질해진다. 엘레나 페란테의 남은 부분들, 남은 책들과 함께할 시간들이 기대된다.
하지만 그 욕조와 수건은 릴라의 것인가 아니면 스테파노의 것인가. 자신의 소유가 될 새로 산 아름다운 물건들이 지금 이 순간 화장실 문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그 인간의 이름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니 더 힘들어졌다. 모든 것이 카라치의 것이었다. 릴라 자신도 카라치 가문의 것이었다. -49p
그 소녀에게는 릴라와 나에겐 없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본질적인 것이었고 그 차이는 멀리서 바라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타고나지 않으면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라틴어, 그리스어, 철학을 아무리 배운다 해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식료품점이나 구두공장에서 벌어들이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었다. -113p
니노와는 그렇지 않았다. 그와 이야기할 때는 그가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의 무지뿐만 아니라 얼마 되지 않는 나는 알지만 그는 모르는 지식도 숨겨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제 나는 그렇게 했고 그가 자신의 생각을 내게 털어놓자 뿌듯했다. -271p
이 책의 최대 매력은 뉴욕이나 런던에서 활동하는 엘리트 2세가 아닌, 촌구석 블루 칼라 커뮤니티를 벗어나려는 언니들의 발버둥이다. 영어권 국가들에도 '변방'은 있지만 모국어가 영어라는 사실만으로도 괜한 반발심이 생긴다. 나폴리 시리즈는 주인공과 저자에게 묘한 질투심을 느끼는 대신, 폭풍 공감과 응원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질투는 자기들끼리 하고 있으니, 쫄깃한 마음으로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엘레나 페란테가 비공개 작가라서 몰입도가 더 크다. 스토리만으로 독자를 사로잡은 그 능력은 읽어보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