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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Jun 25. 2023

어떤 우정, 이 선물한 여행계획

엘레나 페란테,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

 나폴리 4부작 제 4권


소녀를 여자로 만드는 것은 남자보다는 여자라고 생각해왔다. 엘레나 페란테는 그게 정확히 어떤 뜻인지를, 아주 두꺼운 네 권의 소설로 들려주고 있다.

-우리는 과거에 상상했던 미래에 도달한 것일까

(이다혜, <어른이 되어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

145p)



제 1권부터 릴라와 나폴리에 사로잡혀 당연히 정주행을 다짐한, 익명작가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시리즈는 역시 이다혜 작가의 소개로 읽게 된 책이었다. 이 시리즈가 각인되어 있던 차에, 새 동네의 맘에 드는 중고서점에서 발견한 책을 사버렸다. 아껴 읽으면서도 전체 시리즈의 반 이상을 일주일만에 순삭했다. 완독하는 그 순간의 여운을 견디기 힘들거라 생각하면서도 마지막 날 370 페이지를 읽었다. 인생책은 이미 갱신한지 오래다.


그새 나폴리 1권을 구입한 서점에는 질려버렸다. 대신 같은 중고서점 브랜드의 다른 지점에 반해, 엘레나 페란테의 다른 책, <어른들의 거짓된 삶>을 구입함으로써 그 지점과의 우정을 시작했다. 페란테 책장을 마련하는 동안 그녀의 모든 저서를 언어별로 차곡차곡 수집할 것이다. 격한 '서점 산책' 주간에는 나폴리 4부작 영어판이 있는 좌표들도 확인했다. 페란테를 사랑해 마지않는 이다혜 작가와 리베카 솔닛의 작품들도 수집하는 중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이탈리아어도 해야겠다. 이탈리아어를 경유해도 스웨덴어는 30년은 안 걸리겠지.




레누와 릴라가 꾸려가는 아름다운 육아공동체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급하게 마무리된다. 이번에도 니노가 화근이다. 좀, 빨리 니노를 떼어버리고 릴라에게 돌아가라고 그리 애원하며 읽기를 재촉했건만. 레누와 릴라의 우정은 끝없는 시련과 시험을 겪을 뿐이다. 그럼에도 징글징글한 사라토레의 핏줄이 모두를 이어준다. 혈연도 아닌 릴라 이모를 더 많이 닮은 것 같은 레누의 딸들은 엄마를 엿먹이려고 태어난 것 같지만 스토리의 감칠맛에 치명적인 역할을 한다. 본 적도 없는 이 언니들이 어찌나 귀여운지.


나폴리 4부작은 엘레나 페란테의 원고이자 엘레나 그레코의 원고다. 그녀들의 뛰어난 관찰력과 필력에 감탄하면서도 그런 그녀들이 저세상 천재처럼 묘사하는 릴라에게 거침없이 사로잡힌다. 나의 릴라는 어디에선가 잘 지내고 있을까? 쓰는 습관을 유지하고-그래, 일단 3년은 써 보는 거야.-가급적 쓰는 능력을 극대화해서 덕업일치를 하게 된다면 더 바랄게 없겠다. 그러나, 여전히 흔들린다.


나는 무대에서 내려와 구경꾼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사랑하지 않았던 라이벌인 친구의 소식에도 이렇게 흔들리는데, 사랑했으나 깨닫지 못했던 라이벌인 친구의 소식을 어떤 것이든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아직도 우리에겐 머나먼 50대와 60대, 그 이후가 있는데도 벌써 심장이 쫄깃하다.




학생을 가르치는 듯한 교수 같은 말투에 나는 수치심을 느꼈다. 시아버지는 가만히 있어도 권위가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권위라는 것은 결국 일종의 광택제일 뿐이다. 가끔 사소한 일로도 그 권위에 균열이 가면 그 안에 숨어 있는 덜 교화적인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실제로 내가 페미니즘을 언급하자 시아버지는 갑자기 침착성을 읽고 예상치 못한 악의를 눈빛으로 드러냈다. 평소에는 빈혈 환자처럼 창백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비아냥거리며 어디선가 주워들은 페미니즘 슬로건을 노래 가사처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87p


엔초는 릴라에게 종속적인 존재였다. 정말로 사업체를 움직이는 것은, 모든 것을 만들고 해체하는 것은 릴라였다. 약간 과장하면 얼마 안 되는 사이 고향 사람들은 마르첼로와 미켈레처럼 사는 법을 배우든가 아니면 릴라처럼 사는 법을 배우는 두 부류로 나뉘었다. -173p


릴라가 내 딸들의 인생에 들어와 딸들과 가까워졌다는 사실이 거슬리기도 했다. 하지만 릴라가 아이들에게 애정을 쏟고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보살펴주고 아이들의 불안감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3p


밑이라니? 왜 내 동생들이 자기나 마르첼로나 다른 누군가의 밑에서 일해야 한단 말인가. 내 동생들이 남들 밑에서 일하게 된 것은 내가 내 동생들의 학업을 도와주지 않아서인가. 밑이라고? 그 누구도 다른 사람 밑에 있을 수는 없다. 더더구나 솔라라 형제는 말할 것도 없다. 나는 기분이 더 안 좋아져서 아까보다 싸우고 싶은 마음이 강해졌다. -258p


그가 내게 저질렀고 지금 저지르고 있는 일은 매우 섬세한 자각의 과정을 거친 것이다. 니노는 복잡한 개념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었다. 니노는 자신의 행동 떄문에 내가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모욕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이다. -335p


'나는 도대체 왜 지금 이곳에 있지? 왜 이렇게 시간 낭비를 하고 있는 거지? 나는 산 채로 내 딸들과 나폴리에게 잡아먹히고 있어. 이제는 공부도 못하고 글도 쓰지 못하고 그동안 훈련을 통해 습득한 능력도 잃어가고 있어.' -355p


릴라가 다른 데 관심을 쏟을 때는 고통을 느낄 때뿐이었다. 릴라의 해독제는 새로운 고통이었다. 새로운 고통 앞에 릴라는 전투적이고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 물에 빠져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물에 떠 있으려고 팔다리를 움직이는 사람 같았다.

-488p


릴라를 제외한 우리 모두에게는 무언가에 굴복했던 경험이 있었다. 우리는 그런 경험을 통해 시험과 실패와 성공을 겪고 나서 우리 자신을 현실에 알맞게 재조정했다. -564p


이 모든 것은 오직 그리고 영원히 우리 둘만의 문제일 것이다. -654p


우리는 그 돈으로 <작은 아씨들>을 샀다. 그 소설은 릴라에게 <푸른 요정>을 쓰게 했으며 수많은 저서를 쓰고 무엇보다도 <어떤 우정>이라는 작품으로 작가로서 대성공한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662p

 



페란테가 들려주는 우정과 역사 이야기에 사로잡혀, 해외여행 3주컷은 없던 일이 됐다. 미국여행 4주차가 두 번 다 힘들었기 때문에 앞으로는 3주씩만 여행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나폴리를 방문하려면 이탈리아에서만 최소 3주는 머무르게 될 것 같다. 계속 욕심을 부려서 계속 출발이 늦어지는 것 같기도 하지만, 나의 분신들이 소설속에서 여행하고 있는 프랑스와 스페인을 가보지 않을 수도 없지. 큰맘 먹고 스위스는 좀 미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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