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엽이라는 세계
모든 작품에 골고루 마음을 열어본다.
평온하지만 지나치게 광활한 맑은 오로라색 초원에는 다섯 개의 낮달이 떠있고, 어느 고독한 존재가 걸어간다. 하드커버의 앞표지와 뒤표지를 연결한 그림이다. 이 책의 수록작은 대체로 이런 풍경이다. 겉으로 평온해보이는 어느 우주 마을, 버려진 우주 정거장, 잊혀진 우주 비행사, 그리고 천년의 고독.
미래의 역사를 서술하는 목소리는 청량하고, 과학자 할머니들의 뜸들이기는 호기심을 깨운다. 그런데, 정상성/대표성에 대한 문제제기나 인간 본연의 고독까지 군더더기 없이 드러낸다. 고차원적 사고의 결과물을, 여러 편의 발레 공연처럼 보여준다.
보여주는 이, 고통스러울지라도
보는 이는 감탄할 뿐이다. 슬픈 이야기는 슬퍼서 더 아름답고, 신파가 아닌데 가슴이 저려온다. 자동반사적 의미없는 눈물이 아니다. 언어 이해의 영향을 받은 사고(思考)에 의한 눈물이다. 분노를 유발하는 이야기도 담담하고 우아하게 풀어낸다. 순응과 저항의 이분법적 사고를 반성하게 한다. 뭐지 이 사람.
과학적 미스테리와 디스토피아를 좋아한다. 하지만 알을 깨고 나오는 피지배자-혁명가-(캣니스 에버딘과 같은)민중의 대리인이 등장해야 진정성이 느껴진다. 한국의 SF를 대표하는 김초엽은 덜 잔인하면서도 그 모든 요소를 적절히 배합하여 최상의 결과물로 완성했다. 괜히 국민작가가 아니다.
스릴이 있지만 피튀기는 살육은 없고, 일탈이 있지만 끝없이 명랑하지 않다. 집필 당시, 저자가 청춘의 청춘이었음에도, 중년이나 노년의 여성과학자를 전면에 내세워 우리가 우리의 미래를 바라보고 기대하게 한다. 그 점이 가장 고맙다.
아름답고 뛰어난 지성을 가진 신인류가 아니라, 서로를 밟고 그 위에 서지 않는 신인류를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49p,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182p,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의미는 맥락 속에서 부여된다. 하지만 때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담긴 눈물이 아니 단지 눈물 그 자체가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 -215p, 감정의 물성
한 사람의 자아는 끊임없이 변해갑니다. 성장하고, 배우고, 반응하고, 노화하면서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변형되지 않는 마인드는 영혼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은 시점에서 고정되어버린 일종의 박제된 정신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요?
-255p, 관내분실
어떤 사람의 실패는 그가 속한 집단 전부의 실패가 되는데, 어떤 사람의 실패는 그렇지 않다.
-308p,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우주라는 곳은 낭만적이지만 외롭다. 손에 잡힐 것 같은 태양이 보낸 빛과 열이 지구에 닿기까지의 시간이면, 정말로 손에 닿은 무언가를 사랑할 수도 멀어지게 할 수도 있다. 많은 것이 바뀔 수 있는 만큼 머나먼 거리에 있는 별들은 끝내 이룰 수 없는 꿈처럼 달콤하다. 그래서일까, 사이언스 픽션의 원조는 사이언스 로맨스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