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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Jun 27. 2023

할머니에게도 자기만의 인생이 있었어

최은영, <밝은 밤>

플라이북 도서 제공


나의 존재로부터 엄마의 엄마에서 할머니가 된 할머니의 할머니이기 전의 삶은 다만 짐작할 뿐이다. 파란만장했던 20세기 한반도를 살아냈던 여성들의 삶이 있기에, 우리 모두가 존재 이상의 무언가를 추구하며 살 수 있는데 그녀들의 삶을 직면하기엔 여전히 정상가족 프레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21세기 여성들의 현주소일 것이다. 이곳의 역사는 반세기의 격변으로 현실과 이상의 차이만 커졌을 뿐, 여전히 우리는 공포와 우울을 안고 산다.


할머니들의 삶은 외적 조건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고서도 쉽게 더듬어나갈 수 없는 이야기들로 가득할 것이다. <밝은 밤>의 저자 최은영의 말처럼, 누가 툭 치면 쏟아져내릴 물주머니 같은(341p) 상태로 야금야금 읽어나갈 수 밖에 없는 이야기다. 여기, 비로소 각각의 여성으로 불멸의 삶을 얻게 된 우리의 할머니들이 있다.


외로워도 더 독립적이고 더 스스로에게 충실했던 명숙 할머니와 희자는 결혼과 남성들과 시댁과 시대에 짓밟힌 지연의 엄마, 할머니들과 대비된다. 각자의 캐릭터를 간직한 채 여성들이 모여살았던 그 짧은 세월이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을 것이다. 본격 퀴어물은 아닐지라도 비혼 여성을 비중있게 다루는, 여성들의 다양성과 연대 가능성을 이 땅의 역사와 정교하게 직조했다는 점에서 21세기 한국 문학의 희망과 서사의 힘을 느낀다.




앞에서는 듣기 좋은 말을 하면서 뒤에선 다른 말을 하는 사람들, 악의 없는 웃음을 보이면서 다른 마음을 품는 사람들이 흔하고 흔했다. 그런 모습은 어쩌면 인간이 지닌 보편적인 성질인지도 몰랐다. 그런 의미에서 명숙 할머니는 인간이라기보다는 고양이 같았다. 움직이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걷는 것은 물론이고 사람을 대하는 방식도 그랬다. 고양이 중에서도 결코 인간의 무릎에 앉지 않고, 인간에게 치대지 않는 고양이라고 해야 할까. 늘 인간에게서 등을 돌려 앉고, 인간이 자신을 보지 않을 때는 멀리서 바라보다가도 눈길을 주면 외면하는 척하는 고양이. -195p


바다를 실제로 보고서야 바다가 직접 보지 않고는 상상할 수 없는 영역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바다는 할머니가 그때까지 봤던 모든 것 중에 가장 컸다. 처음에는 그 크기에 압도되었지만 자주 보고 지내다보니 바다의 작은 부분들에 정이 들었다. 비가 온 다음날의 바다 냄새, 백사장으로 밀려오는 물의 소리, 하얀 포말, 얇은 조개껍데기 안쪽의 부드러운 감촉, 밀려나온 해초 더미들, 모래사장을 걸을 때의 느낌, 해가 질 때 변하는 수평선 너머의 색깔...

-212p


명숙 할머니가 보내오는 편지에도 할머니는 답을 하지 않았다. 편지에서 묻어 나오는 명숙 할머니의 애정이 할머니는 버거웠다. 명숙 할머니의 편지를 읽다보면 결국 자신이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으니까. 그것도 아주 간절하고 절실하게, 사랑받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됐으니까. 남선의 모진 말들은 얼마든지 견딜 수가 있었다. 하지만 명숙 할머니의 편지를 읽으면 늘 마음이 아팠다. 사랑은 할머니를 울게 했다. 모욕이나 상처조차도 건드리지 못한 마음을 건드렸다. -220p


새비 아주머니는 그런 사람이었다. 사람의 노력을 알아보고 애쓴 마음을 도닥여주는 사람. 겨울에 빨래를 하고있으면 손이 시리지는 않은지 물어보고, 장을 봐오면 다녀오는 길이 힘들지는 않았는지 물어보는 사람. 예전처럼 자기 마음을 살피는 새비 아주머니의 모습을 보니 할머니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257p




양가의 조부모는 네 분이지만, 내가 태어났을 때 맞아주신 조부모는 엄마의 엄마, 한 분이었다. 요즘말로 손녀바보였던 할머니는 친자식—그들도 딸바보와 조카바보였다—들의 질투를 부르실만큼 사랑을 주셨다. 그러나 엄마와는 또 다르게, 할머니와는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할머니의 10주기에 읽었던, <밝은 밤>과 <시선으로부터> 등의 현대사 기반 소설들은 밤마다 베개를 적시게 했다. 우리 할머니도 작품 속에서는 조금 덜 외로우면서 조금 더 재미있게 사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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