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디아 유크나비치 <가장자리>
리디아 유크나비치의 단편집 <가장자리>는 한데 모을 수 없지만 일관되게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의 외침을 담아내고 있다. 그 속에서 금치산자였던 천재해커, 리스베트 살란데르(스티그 라르손 <밀레니엄> 시리즈의 주인공)와 패션천재 청부살인업자 빌라넬(드라마 <킬링 이브>의 주인공), 또는 도망자가 된 FBI 프로파일러 엘리자베스 킨(미국드라마 <블랙리스트>의 주인공)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냉전시대 구 소련의 후예라는 클리셰인 그녀들의 출생 배경이 복선으로 깔리지만 문제의 본질은 당사자들도 모르거나 확신이 없는 스파이의 딸이라는 정체성이 아니다. 그냥 애초에 어떤 이유로 또는 별 이유도 없이 '가장자리'로 밀려난 이들.
만약 동유럽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스스로 지나치게 납득한 나머지 (일련의 매커니즘에 의해) 국제결혼 또는 인신매매(멀리서 보면 구별하기 어려운)의 피해자였다면 해당 작품에서 '시체'로 등장하는 단역일 수도 있는 입장의 위태로운 그녀들.
여성과 변방, 그리고 퀴어함의 조합이 언제까지 스릴러 요소에 머무를 것인가? 이에 대한 일종의 피맛나는 응답이 바로 이 책에 실린 20편의 단편소설이다. 고통을 가식없이 우아하게 이야기하다 돌연 본능적인 욕설(감탄사)로 응축하다 다시 담담하게 열린 결말로 마무리한다.
어느 소녀의 성장기이기도 하고,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해피엔딩인지 알 수 없지만 여자의 운명은 계속 나아가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이다.
퀴어한 남자아이와 광기를 품은 여자아이, 고통을 치유하는 미국횡단여행(완전 내 취향)과 비로소 처음으로 마주한 (존재하지 않는) 안정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중산층 엘리트 여성은 그리 먼 곳에 있지도 않다. 중산층 엘리트 백인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은 여성에게 중산층 엘리트라는 분류는 허울이다.
몸을 누일 안락한 집과 매일 밤 함께 잠자리에 들 다른 포유류와 충분한 음식과 포도주와 커피 테이블이 생긴 후로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위험은 우리를 자극한다.
-68p, 거리 위의 사람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백인 남성 천재 예술가고,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백인 남성 천재 예술가의 삶에는 진실한 거라곤 하나도 없다.
-96p, 연구 대상: (폭발하는) 여자
어쩌면 영웅이나 구원자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걸지도, 그런 이야기들은 여자아이들의 머릿속에서 동물이 되는 법을 지워내기 위한 속임수일지도 몰랐다. -126p, 제2의 언어
가짜 손톱을 붙이고 다리 사이에 베이비파우더를 바른 채 리넨이 깔린 테이블에 앉아 식초 뿌린 치킨 샐러드를 주문해 립스틱이 번지지 않게 씹으려고 기를 쓰는 여자들에게, 여자의 운명은 계속 나아가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라는 걸 어떻게 이해시키지?
-134p, 드러내는 여자
내겐 단어가 빼곡한 페이지마다 전부 도망칠 기회였고, 나를 죽일 기회였고, 내 뇌가 꾸물거리는 회색 애벌레 이상의 무언가로 다시 태어날 기회, 몸이 몸의 기원과 족쇄를 벗어던지고 끝없이 변화할 수 있는 세상에서 다시 태어날 기회였다. 책을 들고 있으면 두 손으로 온세상이 만져졌다.
-166p, 여자아이와 여자아이
내 삶처럼 그들의 삶도 바뀌고 있었고, 그들의 몸 역시 다른 종족으로, 피가 뜨거운 포유류에서 배가 차갑고 어둠을 꿰뚫을 수 있는 무언가로, 사막에서도 사아남을 수 있는 무언가로 변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생존과 결핍에 대한 태고의 감각이 있었으며 그 감각은 삶의 동력이었다.
-179p, 여자아이와 여자아이
<가장자리>를 통해서 가장자리를 간접경험할 수 있다면 엄청난 행운과 특권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정말정말 극소수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범죄스릴러와 고통스러운 변주곡에서 아웃사이더를 발견하고 그들의 처절한 복수를 통해 대리만족 했다. 이제는 극적 장치를 거치지 않은 담백한 호흡으로 전세계 아웃사이더와 공명하는 스토리를 한께 읽어볼 수 있다. 저자 리디아 유크나비치의 회고록, <숨을 참던 나날>도 읽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