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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Sep 21. 2023

완전하지 않기에 더욱 이상적인 유토피아

마리아 투르트샤니노프 <레드 수도원 연대기>

출판사 도서제공



그동안 책, 드라마, 영화 등 많은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한 줌도 안 되는) 여성들이 지나치게 사이가 나쁘거나 지나치게 사이가 좋은 경우를, 지나치게 올바르거나 지나치게 비뚤어진 경우를 흔히 보지 않았는가. -2권 453p (옮긴이의 말)




금남의 섬 '메노스'에 있는 레드 수도원에 야이가 도착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1부의 서술자 마레시는 신력이 있는 수련수녀로써 야이 사건을 기록하는 역할을 맡는다. 기숙학교 역할을 겸하는 수도원의 주요 인물은 아직 하이틴이다.


몰입해서 빨리 읽을 수 있는 한편 몰입 자체가 쉽지는 않았다. 낯선 이름들과 음식들, <해리포터>의 도입부처럼 아직 너무 어린 아이들, <듄>의 도입부처럼 세계관 설정에 적응해야 했다. 그럼에도 분량이 길지 않아 곧 1부가 끝나고 2부가 시작됐다.




메노스를 처음 개척한 일곱 혹은 여덟 명의 수녀(?)들이 어떻게 모이게 됐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2부 전체에서 장엄한 대하드라마로 펼쳐진다. 신력이 있는 카비라가 사랑에 눈이 멀어 '아니'라는 신성한 장소를 악마같은 남자와 공유하면서 비극이 시작된다. 오랜 시간 고통받는 카비라에게는 비극이지만 1부에서 미리보기를 했듯이 이 이야기는 승리의 역사다. 스스로가 비극을 자초했다는 죄책감이 평생 카비라를 짓눌렀을 것이다.


여성의 신력과 토테미즘의 진가에 눈을 뜬 카비라의 남편은 왕실과 주변 국가를 장악하고 곳곳에서 신통력이 있는 여성들을 수집하여 부인들이 사는 집에 데려온다. 시간과 위기, 사랑 등 다양한 이유로 가까워지거나 혹은 그저 최소한의 동료애가 싹트는 이 여성들은 살아남아 기록하기로 한다.


여성과 자연을 동일시하는 토테미즘 구도는 온갖 신화, 전설, 판타지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데 <레드 수도원 연대기> 시리즈의 또다른 주인공인 에시코는 그 또한 넘어서는 인물이라 흥미진진하다. 역사와 판타지, 디스토피아의 클리셰에 어느 정도 충실하면서도 마리아 투르트샤니노프가 돌파하고자 하는 마지막 고정관념들이 곳곳에 과하지 않게 걸려있다.




못 할 것이 없었다. 하지 않은 것도 없었다. 사랑에 빠진 여자들이 한다는 모든 일, 금지된 일, 내가 그렇게도 멸시하던 일을 나도 했다. 밤이 되면 사람들 몰래 연인을 만나러 집을 빠져나가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2권 47p


어머니는 머릿속에 있는 걸 우리에게 이야기로 들려주셨고 우리가 들은 것을 다시 어머니께 이야기하게 하셨다. 내용의 본질만 전할 수 있다면 완전히 똑같이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사이 내 습득력이 떨어져 전만큼 지식을 정확히 흡수하지 못한 것이 느껴졌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를 위해 다시 공부해야 한다. -2권 122p


사람이 살고 싶은 욕구가 얼마나 강한지 믿기지 않을 때가 있다. 죽고 싶을 때조차 우리의 몸은 계속해서 숨 쉬고, 먹고, 자고, 사랑하기를 원한다.

-2권 176p


그녀는 산산조각으로 부서진 나를 조용히 끌어안아 주었다. 내 몸을, 내 존재를. 그녀의 따스한 보살핌으로 나는 다시 온전히 기워질 수 있었다. - 2권 274p


남자는 우리를 기다리게 하는 것을 좋아했다. 우리의 시간은 그가 마음껏 낭비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남자가 텅 빈 방에 들어서는 일은 일어나선 안 됐다. 우리가 남자의 시간에 맞춰 움직여야 했다.

-2권 333p


에스테기와의 탈출, 내가 원한 건 이게 다였다. 그런데 에스테기가 날개가 부러진 여자들을 한 명씩 차례로 데려왔다. 그게 에스테기였다. -2권 392p


여자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이 섬에 대한 소문이 세상을 떠돌았다. 그 이야기는 매 맞고 박해받고 학대당하는 소녀들의 귀에 들어갔다. -2권 443p




하지만 세상을 피해 숨으려고 수도원을 핑계 삼아서는 안 된단다. -1권 51p


하지만 그건 전적으로 우나이를 위해서였어. 나는 우나이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했거든. 하지만 우나이처럼 순종적인 아이가 될 수는 없었어. 아버지든 다른 남자든 그 누구와도 절대 눈을 안 마주치고, 고개 숙이고, 어떤 모욕을 해도 '네, 아버지' 하고 대답하는 건 난 절대 할 수 없었어. -1권 101p




호들갑떨지 않고 자연스럽게 확장되는 자매애와 동성애, 본의 아니게 한 남자를 공유하는 과정에서 질투, 서열 문제도 있었지만 과하지 않게 처리되거나, 살균하지 않고 그대로 남은 채 시간이 흐른다. 그렇게 1부로 연결되고, 이제 3부가 남았다. 아주 긴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3부가 더 길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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