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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Aug 19. 2023

모든 일은 그곳에 네가 있었기 때문에

우사미 마코토 <밤의 소리를 듣다>

도서전의 존재를 처음으로 분명하게 각인했던 작년에는 오, 이건 가야 돼! 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그에 대한 후회는 없었다. 국내 전시 관람을 시작으로 연간 티켓 부자인 올해(포스트 코로나 1년차)는 끌리는 전시와 행사가 많았고 그 중심에 '서울국제도서전'이 있었다. 도서전 리뷰에서 밝혔듯, 이번 도서전을 통해 각인하게 된 베스트 출판사는 은행나무(이미 많이 읽고 있음), 마음산책(읽을 예정인 책이 많음), 블루홀식스였는데 바로 낯선 이름의 블루홀식스 부스에서 특색있는 일본 스릴러와 담당자님의 밝은 응대를 만나 기약없이 머물러있었다.


지나가는 독자님들의 풍월도 주워담고 있었다. 책은 많았지만, 애독자라고 밝힌 한 익명독자의 원픽은 우사미 마코토의 <밤의 소리를 듣다>였고 그 망설임 없는 추천에 이끌려 책을 샀다. 생각보다 오래오래 갉아먹듯 읽었다. 그 무렵, 산 책은 어마하게 쌓여가는데 읽는 속도에 버퍼링이 걸렸다. 결과적으로는 이 책의 후반부터, 연달아 다섯 권을 매일 독파했다. 이 책으로만 말하자면 전반부는 일주일 이상, 후반부는 약 3시간 정도로 요약된다. 천천히 스며들어 엄청난 추진력을 남겨놓은 책이었다.    




추억의 장소를 찾아간 주인공은 17년 전을 회상하기 시작한다. 그때 만났던 사람, 그 사람 때문에 고초를 겪으면서도 그 사람이 궁금해서 다니게 된 학교, 그 곳에서 만난 새로운 친구와 그 친구를 통해 알게 된 세계. 무엇보다도 '관계'의 소중함을 발견하는 과정이 독특하면서도 아련했다. 한글 책을 읽지 않던 시기에도 단숨에 읽어버린 친구 추천작 <아몬드>가 생각나는 관계였다. 아픈 아이와 상처입은 아이의 서툴지만 소중한 우정은 사건과 별개로 작품의 긴장감과 감성적 풍성함을 담당한다.


그 소년들이 사건을 하나씩 해결하는 과정은 아주 느리게 시작해서(물론 내가 느리게 읽어서 그렇게 느꼈지만) 점점 대차게 조여온다. 특히 부모의 이혼으로 헤어진 자매를 만나면서 두 주인공의 결속과 작품의 구심력이 수직상승한다. 이 자매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흥미와 소름을 담당한다.


상처입은 아이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스포일러 형님의 등장도 재미있다. 그와 함께 동물과 특히 식물의 다양한 명칭이 등장한다. 아래의 인용문에도 포함된 정원과 숲에 대한 묘사는 활자를 통한 산림욕과 독자의 상상력 확장을 담당한다.




손원평의 <아몬드> 겹쳐지는, 코넌 도일의 <셜록 홈즈> 스타일 2인조 브로맨스에 의외로  어울리는,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처럼 나무나무한 묘사(영어로 읽었는데 나무 이름이 너무 많이 나와서 천천히 읽었고 뒤로 갈수록 빨라졌다.)  스푼이 들어간 감성 로맨스릴러.


더불어 오랜만에 일본 소설을 읽고 (이어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신작도 읽고) 독서의 방향을 다시 다양하게, 좀 느슨하게 기획해보기로 했다. 같은 날, 도서전에서 다소 뻔한 장바구니 책들만 집어 온 것과 달리, 계획 구매가 아니었던 책이다. 덕분에 사 놓고 방치했는 호러문학을 독파하는 중이고, (내가 봐도 질리는) 영국과 프랑스를 벗어나 다양한 국가의 문학과 재회하기로 한다. 이번 주에 구입한 7권의 책은 저자의 출신국이 모두 다르다.

    



일본 학교에서는 대체로 학생들에게 획일성을 강요했고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는 사람을 꺼렸다. 나는 또래 아이들보다 빠르고, 깊고, 넓게 배우고 싶었지만 그런 환경의 학교는 없었다. 교사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거나 가끔 이상한 생각을 입에 담는 나를 반 아이들은 점차 멀리하기 시작했다. -21p


사회와의 접점은 끊겼다. 같은 반이었던 예전 친구들은 단 한 명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매일매일 세상의 뉴스를 접하기는 했다. 일본의 정치와 경제 구조를 머릿속에 넣었고 국제 사회의 흐름에도 민감했다. 이따금 집 밖으로 산책을 나갔다. 공원에서 멍하니 있거나 책을 읽었다. 그러나 그뿐이었고 나의 세계는 여전히 작고 협소했다. -25p


유리코가 특별히 달라지지는 않은 것 같아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얀 손으로 마트료시카 인형을 분리해 테이블에 늘어놓는 모습이 마치 정리되지 않은 자신의 자아를 하나씩 꺼내는 것 같다. 색 바랜 슬픈 얼굴의 마트료시카 인형 다섯 개가 테이블에 나란히 놓였다. 유리코는 그중 제일 작은 인형의 이마를 손끝으로 쿡 찔렀다. -81p




<쏙독새의 별>을 꺼내 조심스레 책장을 펼쳤다. 등에 벽을 기댄 채 이제는 오래돼 거의 잊어버린 이야기를 읽었다. 못생긴 쏙독새는 '다카'라는 이름 떄문에 진짜 매(다카)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으로 모자라 이름을 바꾸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협박까지 듣는다. 꼭 찢어진 것 같은 붉은 입으로 벌레를 통째로 삼키며 살아가는 자신의 추한 모습에도 절망한다.

-109p


어제 다이고에게 '집사란 무엇인지' 설명해 줬지만 설명할수록 현실과는 동떨어진 느낌이라 나도 점점 헷갈리기 시작했다. 애초에 일본의 직업 체계에서는 생소한 일이고, 원래 영국 상류층 집 안의 가사 도우미 직종 중 최상급 지위에 있는 이를 뜻하는 단어로 쓰였다. -126p




거대한 판유리창 너머에 넓은 정원이 내려다보인다. 그야말로 '정원'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곳이었다. 손질된 잔디 너머로 가지를 길게 뻗은 오래된 벚나무가 서 있다. 지금은 푸른 잎이 무성하지만 봄이 되면 예쁜 꽃을 피울 것이다. 그 아래에는 키 작은 수국 몇 그루가 그루터기 모양으로 깎여 있는데 이쪽에는 연보라색 꽃이 만개했다. 꽃을 피우는 나무를 돋보이게 할 목적인지 뒤쪽은 상록수들로 채워졌다. 주목과 후피향나무, 나한송 등이다. -133p


정원 너머로 구릉지가 펼쳐져 있었다. 그 풍경을 배경 삼아 정원을 보다 보면 자연의 정취가 물씬 풍겨서 마치 숲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도 들었다. 떡갈나무와 물푸레나무, 매화오리나무 등 구릉지에서 본 고목 아래에 갈참나무와 누리장나무 등 키 작은 나무들이 자라 있다. 잡초들도 마음껏 고개를 뻗었고 그 안에 주황색 백양꽃이 핀 게 보였다. 꽃 위에는 제비나비가 날고 있었다. -134p


의외로 넒은 현관 앞 토방에 우리 몸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검은 얼룩을 만들었다. 현관 앞에는 대나무로 엮은 바구니와 손수 만든 선반이 있었다. 바구니 안에는 말뚝과 지주, 밧줄 등이 들었고 선반에 톱과 끌, 나무망치 등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작은 나무 의자 주변에는 나무 부스러기가 조금 떨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통나무를 말뚝으로 가공하는 등의 작업을 하는 듯했다. -145p




해가 어떤 위치에 오면 나무 위 구멍에도 햇빛이 비친다. 그러면 아래쪽에 떨어진 에메랄드 떄문에 가늘게 이어진 뿌리 쪽 구멍을 통해 라쿤 굴에도 초록빛이 보인다. 그 빛을 보고 호기심 많은 라쿤은 이 썩은 나무 속을 발톱으로 열심히 파며 올라갔을 것이다. -162p


"곤줄박이는 먹이를 숨겨 둔 장소를 기억해 뒀다가 대개 겨울이 되면 꺼내 먹는데 그래도 몇 개는 먹다가 남기죠. 그것들이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가 땅에 얕게 묻히면 봄에 싹을 틔워요. 상대를 이용하는 쪽이 관연 곤줄박이일까요, 때죽나무일까요." -171p


"물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건 상상력과 감성이란다. 물리 법칙을 수식으로 표현하기 이전에 모든 사안을 꼼꼼히 관찰하며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물질을 움직이는지 판별하는 거지. 거기에는 상상력이 필요하고, 일종의 직감 같은 것을 주는 게 바로 감성이란다. 너희가 에메랄드가 사라진 수수께끼를 해결할 떄 곤줄박이의 습성에 주목한 것처럼." -235p




훌륭한 형, 훌륭한 언니, 반발심은 들지만 어떡해야 좋을지는 모른다. 가시마 씨는 그래서 폐인이 됐고 유리코는 리스트 커터가 되었다. 유리코의 아버지는 죽은 동생에게서 딸의 모습을 겹쳐 보며 지금도 걱정하고 있다고 했다. -246p


이 노파는 모든 일을 설렁설렁하고 대충 판단하는 것 같지만 결국 모든 일이 마땅히 향해야 할 귀착점으로 향하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런 걸 미리 계산했을 리 없는데도 아무렇게나 뻗어 간 실타래가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정작 본인은 담담하지만. -267p


다이고 나름대로 완성한 인생의 서바이벌 기술일까. 다른 사람과 쉽게 친해지는 개방적인 사람을 연기하며 속으로는 타인이 자기 안에 한 발짝도 들어오지 못하게 장벽을 치고 있다. 모르겠다. 이제는 나도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다이고와 속을 터놓고 대화하기도 두려웠다. 그러니 나도 할 수밖에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다이고와 지금까지와 똑같이 지내려면 그래야 했다. -287p




일본 소설을 또 언제 읽을지 모르겠지만, 우사미 마코토의 다른 책을 먼저 읽을 것 같다. 이과 감성 풍부한 고밀도의 스릴러를 읽었으니 쌓아둔 과학책과 북유럽 스릴러도 올해 안에 읽을 수 있겠지?


아, 그 전에 <오펜하이머> 리뷰도 쓸건데 원작인 오펜하이머 전기는 너무 두꺼운 비문학이라 안 읽기로 했다.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 주관적인 총평을 내리자면 <이미테이션 게임>이 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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