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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Oct 06. 2023

이 느낌의 끝에 뭐가 있을까?

고요한 <사랑이 스테이크라니>

이번만은 피하지 않고 이 느낌이 무엇인지, 이 느낌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끝까지 가 보고 싶었다. 끝까지 가 보면 그곳에 무엇이 놓여 있을지 알 것 같았다. -186p, 도마뱀과 라오커피




<결혼은 세 번쯤 하는 게 좋아>로 시선강탈을 했던 고요한 작가의 단편집 <사랑이 스테이크라니>를 읽었다. 독서기록을 정리하다, 작년 10월 3일에 <결혼은...>을 리뷰하고 올해 10월 3일에 <사랑이...>를 리뷰할 예정이었던 것을 보고 계절을 실감했다.


귀뚜라미가 우는 10월이구나.


<결혼은...>은 오랜만에 내돈내산한 한국소설이었고, 그게 이 책이 된 이유는 미국여행기(첫번째 브런치북, <무한대 미국산책>)를 쓰고 있었기 때문.


2022년 기준, <결혼은 세 번쯤 하는 게 좋아>를 구입하기 전 10년 동안, 영어와 씨름하느라 한국소설은 <82년생 김지영> 한 권 밖에 구입하지 않았고 주로 선물받아서 읽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미국병에 걸렸을(?) 때조차 읽고 싶었던 책을 써 주신 고요한 작가의 다른 작품도 당연히 궁금했다.


​1년을 다 채우고서야 다시 만났다. 장편소설 <우리의 밤이 시작되는 곳>의 초판 발행일이 내 생일인 줄 알고 먼저 읽으려고 했는데 발행일이 아니라 인쇄일이었고, 그래서 초판 1쇄가 아니면 안 되는(?) 동공지진... 상태를 거쳐 <결혼은...>처럼 표지가 시선강탈을 하는 <사랑이 스테이크라니>를 먼저 데려왔다. 이것도 신의 한 수!




나는 불가지론자이긴 하지만 절과 성당을 오가는 단편집의 화자들이 어쩐지 이해가 된다. (연작이 아니므로 동일 인물은 아니다.) 화자들은 <결혼은...>의 주인공처럼 한국인 혈통의 미국 사람을 포함해 사랑과 불능과 이별, 끝없는 결핍과 방치 속에서 망연자실과 호접지몽을 오간다.


어쩌면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을 말 그대로 '말하지 않고 보여주는' 저자의 재능과 에너지가 이 단편집의 핵심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장편과는 또 다른, 단편들만의 저세상 텐션이 즐거웠다.


그보다는 저릿하고 아련했다. 불가능한 화해와 끔찍한 대안, 그리고 열린 결말. 개인이라는 이유(인간은 모두 혼자다)를 넘어서는 이해받기 어려운 고독. 정체성은 다르지만 어쩐지 조금씩 닮아있는 작품 속 화자들은 성격을 보아하니 어디가서 이런 이야기를 하지도 못하고, 독백조로 어딘가에 이야기를 남겨놓고 있지만, 이 말들이 어딘가에 닿을 거라는 확신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그만큼 내밀한 이야기들, 다 이해하려고 하기 보다는 흘러가게 놓아두어야 하는 그런 이야기들.



그들은 내게 가짜 미소를 지으며 전과 같이 대한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미소를 지으면서도 마음속에서는 거리를 두죠. 내가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도록. 가족들조차 마음의 거리를 둘 때의 외로움은 말로 표현 못 해요. -194p, 도마뱀과 라오커피


한 계단의 거리는 점차 벌어져 두 계단이 되었고 세 계단이 되었고 어느 순간 보이지 않을 만큼 간격이 벌어졌다. -212p, 오래된 크리스마스


그런데 그게 사랑이 아니라니. 참고 견뎠던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니. -219p, 오래된 크리스마스




오리를 날리고 종이비행기를 날리고 종이새를 날리던 화자들의 마음이 오랫동안 아른거릴 것 같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딱 한 작품만 고르라면 아마도 이 책에서만 접할 수 있는 '도마뱀과 라오커피'를 주저없이 선택할 것이다. 타지를 배경으로 묘사하는데 탁월한 저자의 세 나라 이야기를 짧은 작품 속에서 만날 수 있다. 그 안에 다양한, 말 못할, 이쪽도 저쪽도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를.


지금 우리 시대는 스테레오 타입의 젠더 뿐만 아니라, 퀴어와 일반이라는 이분법 또한 맞서야 하는 구도가 되고 있다. 이전에는 일반을 뚫고 퀴어가 등장했어야 하지만, 일반도 퀴어도 아닌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어쩌면 여기에 평생을 매달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일반이 아니라고 다 퀴어는 아니고, 퀴어가 아니라고 일반의 사고방식이 편안한 것이 아니란 사실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을 가능한 많이 찾아낼 것이다.




마이산의 향기가 가득한 '오래된 크리스마스'도 추천한다. 이번에는 잘 아는 지역에서 펼쳐지는 평범한 듯 쓰라린 이야기가 등장한다.


여운이 진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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