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니 가머스, <레슨 인 케미스트리>
과거 그녀는 방화범의 자식, 남편을 갈아치우는 여자의 딸, 목매달아 죽은 동성애자의 동생 아니면 호색한으로 유명한 교수 밑에 있던 대학원생일 뿐이었다. 지금은 유명한 화학자의 여자친구가 되었다. 오롯이 엘리자베스 조트로 받아들여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1권 85p, 헤이스팅스 구내식당
사실주의와 판타지의 경계에서 이 책은 아이의 관점에서 또는 개의 관점에서, 평범하게 살아왔으나 남다른 통찰력을 지닌 중년 여성과 목사의 관점에서, 천재성을 타고났으나 사랑에 굶주린 과학자들 그리고 같은 상처와 분노를 공유하게된 여성 노동자들의 관점에서 60년대 미국 사회를 냉소하고 있다. 한국전쟁 직후의 시대적 분위기를 짐작하기는 쉽지 않지만 거의 유일한 참고자료인 미국드라마 <매드맨>이 자꾸 생각나는 작품이다.
헤이스팅스 연구소에서 주인공과 적대관계를 형성했던 프래스크의 대사에는 <매드맨>에서 도도한 여성미(?)를 뽐내는 조앤 역의 크리스티나 핸드릭스가 음성지원을 하고, 덩달아 주인공 엘리자베스의 조금은 로봇 같은 당당함에는 <매드맨>의 주인공 페기 역의 엘리자베스 모스(마거릿 애트우드 소설 원작 미드 <Handmaid's Tale; 시녀이야기> 시리즈의 주인공)의 지치지 않는 패기가 입혀진다.
그 시절, 여성은 카피라이터가 될 수 없고 하녀, 그것도 대상화된 19금 하녀처럼 비서직을 수행(페기는 입사 첫 날 피임 시술을 받는다?)하는 광고회사에서 여성 최초로 카피라이터가 되는 페기와 여성 최초로 CEO가 되는 조앤처럼. <레슨 인 케미스트리>의 엘리자베스 조트는 자타공인 과학자로 거듭나고, 프래스크도 결국 마땅히 올라야 할 자리를 찾게 된다.
그 과정이 어렵고 복잡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기에 그것만으로도 대서사시 한편이 완성될 수 있다. 주요인물의 품성과 서술자의 유머감각을 잃지 않음으로 작품성도 확보하고 있다. 남성들의 조력이 꼭 필요했나, 하는 의문이 남지만 그 또한 시대적인 요소이자 현재와 미래에 꼭 필요한 희망이다. 이다혜 작가가 <어른이 되어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 에필로그에 쓴 것처럼 다음 세대의 여성들은 여성, 이민자, 장애인의 조력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남성들이 결정권을 가진 자리에 압도적으로 많았던 세대로는 우리가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
<시녀이야기>와 <매드맨>, <레슨 인 케미스트리>의 주인공들은 끝없는 에너지를 소유한 사람들이다. 조력자는 조력자일 뿐. 그녀들 자신이 지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를 조력했다. 그리고 그녀들의 조력자 역시 그녀들의 '조력'이 가장 필요했던 사람이었다. 무기력한 여성을 돌보는 백마탄 왕자가 아니었다. 스스로 일어서고자 하는 여성들에게 기꺼이 필요한 만큼의 도움만 주고자 했다.
베이킹이라는 정교한 작업이 여성성을 광고하는 사회적 아양으로 오인되는 것에 불쾌함을 느꼈다는 옮긴이의 말도 인상적이다. 순정만화나 여성스러운 패션 취향에 이중적인 감정을 느끼듯, 요리는 자랑하고 싶지 않은 특기이면서도 현모양처 코스프레용으로는 딱이다. 엉뚱한 곳에서 자랑하게 되면 스스로를 하녀화하는 저평가된 재주라, 먹여살릴 자식이 없다면 비밀리에 간직한다? (내가 요리사인 것을 적들에게 알리지 말라.)
대학원은 아직도 못 갔지만, 요리와 화학이 융합된 실험은 30년쯤 된 취미이자 라이프스타일이자 확장된 전공(?)이다. 문/이과 테스트에서 분자식(H2O)으로 '물'을 표현하는 부류의 사람을 언급하던데 실제로 그런 사람은 많지 않다. 가끔은 소금보다 염화나트륨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편안하지만 NaCl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베이킹이 말 못할 컴플렉스였고 이제와서 되돌아보면 그 와중에 현모양처 코스프레를 했던 점이 더 수치스럽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조트가 조리대 위 실험을 통해 여성들의 자존감을 회복시켜주는 과정은 짜릿했다.
<매드맨> 시대(1960년대 맨해튼 폭풍성장기의 매디슨 애비뉴 광고업계를 조명한 뉴욕 드라마)의 과학계를 조망한 백발의 신진작가 보니 가머스의 천재적 시대물을 통해, 여성적이라는 딱지가 붙은 공부가 싫었지만 벗어나지 못했다는 자기비하, 를 곧 내려놓을 수 있겠다. 여자라서 옷을 좋아한다거나 스스로 아름답고 싶어한다는 고정관념이 매우 구닥다리가 되는 시대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여성을 '예쁨'속에 가둔 건 남성인데 왜 예뻐도 안 예뻐도 비난을 사는 건 여성일까? 여성의 유혹을 '참을 수 없는' 그 참을성 없는 이들은 왜 여성이 '유혹'이라는 주체적인 행동을 했다고 비난할까? 여성이야말로 유혹하고 싶어도 '참아야 하는' 날들이 수두룩한데.
여성에게 요구하는 성품이 부당함을 느끼지만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것을 넘어선 여성들이 서로 적대하는 현실을 좀더 넓은 시야에서 다시 봐야할 것이다. 여자아이들에게 '착하다', '예쁘다'는 (주로 '얌전해서'라는 조건부) 칭찬을 하기 보다, 하고 싶은 것을 다 해도 되는 세상을 물려주고 싶다.
그들은 회사마다 다수를 차지하는 부류의 사람, 즉 평범한 일을 하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가끔 고무적이지 않은 성과를 내고 승진하는 자들, 세상을 바꿀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실수로 세상을 날려버리지도 않는 사람들 말이다. -1권 186p, 바보
아무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하는 남자들이 흔히 그러듯, 슬로운 씨는 자신이 여자들에게 통하는 매력이 있다고 진심으로 믿었다. 해리엇은 참으로 의아했다. 대체 이런 터무니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생기는 걸까. -1권 252p, 서류상으로는 매드
월터는 무신경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부류의 인간과 같이 있으면 월터는 스스로가 내숭을 떨고 남의 눈치를 보는 인위적인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이제는 멸종 위기에 처한 '예의 바른 사람'이 된 것 같달까. -1권 333p, 오후의 저기압대
"여자들은 왜 이러는 걸까요? 왜 이런 문화적 고정관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죠? 게다가 왜 그걸 점점 더 굳건하게 만들까요?"
-2권 48p, 나에 대해 알아볼까요
"가끔 사람들은 너희 엄마 같은 유명인의 사생활을 알고 싶어 한단다. 그러면 자기들이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 그러려면 너희 엄마에 대해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야 해. 그런 이야기는 좋지 않은 내용일 때가 많아." -2권 129p, 미디엄 레어
솔직히 개는 그녀가 조금 안쓰럽기도 했다. 이토록 비열한 사람은 처음부터 그랬던 게 아니라, 남들로부터 비열한 대접을 받은 나머지 인간성이 그렇게 변한 것이니까. -2권 169p, 실패의 냄새
사과하고 싶었지만 로스는 글을 쓰는 사람인지라 말로 하는 사과 따위는 통하지 않으리라는 점을 이미 알고 있었다. 진정한 사과는 말로 이루어지는 법이 좀처럼 없는 법이다. -2권 186p, <라이프>와 죽음
"난 네가 참 자랑스러워. 너는 가족을 아주 정직하고 광범위하게 정의했어. 가족이란 생물학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지." -2권 205p, 브라우니
솔직히 말하자면 평범한 로맨스 소설이든 여성주의 소설이든, 불행한 여주인공의 이야기를 읽으면 난 너무 힘이 든다. 아무리 재미있어도 속이 터져서 읽다 그만두는 경우도 많다. 그런 작품을 번역까지 하고 나면 며칠은 앓아 눕는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나를 지치게 하지 않았다. -2권 285p, 옮긴이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