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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Mar 23. 2024

배움의 본질

단편소설 <나머지정리>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같다. 그보다는   사이클을 위해서 출발점에 한번  서보는 것이라고 하자. 여기에서, 빠르게 쌓아올린 젊은 날의 업적이 시작됐었다. 그때는 아무리 빠르게 달려도 목마름을 채울  없었다. 분명 표고도 평생, 적어도   이상 예술에 몸과 마음을 바쳤지만 그녀가 한시라도 빨리 알았다면  좋았을 것들을 발견할 때마다 맹렬하게 파고들었다. 아직 어렸다.


그때는 그저 여러번 반복하고  반복해서 몸이 기억하게 하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도상으로  것을 기억하는 것이 유리한 두뇌로, 자면서도 그릴  있을 만큼 원하는 형식을 체화하면 어느새 꿈에서 새로운 창작을 하게 된다. 그런 날들이 계속 됐다.


사소한 정체기를 제외하면 후진이 없던 3, 보기보다 기본기와 가장 중요한 체력(또는 주량) 평균 언저리였기에 특출날  없는 보통 사람임을 인정해야하는 순간이 다가왔다. 그녀를 '천재' 대우하는, 본인에게만 좋은(?) 콩깍지를 쓰고 계신 선배들 덕분에 그녀 자신이  특혜를 깨지 못했다. 시스템, 무엇보다도 언니들의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납작 엎드려야함을 깨닫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다.




멀리서 보면 대대적인 정체기였던  5년의 시작은 결국 그들과의 만남이었다. 그들의 기대와 애정은 거대한 동력이었고, 다른 사소한 스크래치에 토막나지 않을  있는 강력한 보호막이었다. 무엇보다도 닮고 싶은 마음, 지금은  달라졌지만 그때만 해도 닮고 싶은 선배의 유무가 결정적 동력이 되었다. 다만 스스로에 대한 과대평가 때문에 코어의 성장을 늦추었다. 모든 사람에게 배워야 하고, 특히 타고난 것처럼 보이지만 실속있는 노력파라던지 말그대로 순수한 제자들에게 배우는 것이  강렬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만  3년이 걸렸다.


배움의 본질에 접근하는 동안 표고는 자신의 본질 또한 의심하게 된다. 과연 그녀의 필살기가 회화인가? 입체 작품으로 이상을 구현할 때 짜릿함을 더 느끼지 않는가? (그러나 재료 관리가 매우 버거운 것도 사실이다.) 그림을 그릴 때 반드시 필요한 요소인 음악도 창작의 동력이지 않나? 음악으로 그라데이션했던 연작의 의미는 무엇일까? 관련된 (죽은) 작가들의 작품은 어떤 연결고리가 있지? 보이는 것과 수면 아래에 있는 것이 정말 관련이 있나? 현대미술의 철학적 흐름은 어떻게 따라갈 것인가?


비록 졸업을 하지는 못했지만 연수와 표고는 경영대학원을 다니며 영역을 확장해보려고 했다. 연수는 그쪽으로 타고난 감각없다. 표고는 경험과 자본이 부족했고, 치기와 야망이 컸기에 (당연하게도) 진위를 파악해낼 혜안이 없었다. 의리 때문에 잘못 흘러들어간 곳에서 약간의 자기탐구의 기회를 얻고 청춘의 에너지를 내주었다.


,  정도는 누구나 겪을 법한 일이다. 무브 .




선배들의 응원에 힘입어 자신있게 독립하고 1 만에 후퇴하고 다시 1 동안 우왕좌왕하다가 나락으로 떨어져서 자연인의 삶을 잠시 즐겼다고 하기엔 치욕적인 시간들이 지나갔다. 여기서 물러설 표고가 아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량 같은, 실제로는 나름 바빴지만 이력서가 텅텅 비어있는 2년을 보내고 나서 정신을 차렸다. 확실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동안 조용히 계획한 프로젝트를 가동시켰다. 그간의 휴식 아닌 휴식으로 조금은 겸손한 척할  있게 됐다. 어차피  사람은 금방 알게 되겠지. 그렇게 고작 2년을 물러나있다가 돌아왔다.


대신 그녀만의 분야를 생성하고 있었다. 기존의, 그러나 조금 다른 스타일로 복귀하되 실험적 장르를 성실하게 (초심자의 자세로) 배웠고 작업 속도에 따라 빠른 기간 안에 정산을 받는 벽화 현장에도 투입됐다. 더 잘 그릴 것이고, 더 다양하게 그릴 것이고, 그리는 그 즉시 수입을 창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멍때리는 시간이 많았던 2년을 보낸 후여서 복귀하던 해에는 힘이 넘쳤다. 그동안 참아왔던 나대고 싶은 욕망, 보다는 날리고 싶은 욕망이 터졌다.




모든 것은 흥망성쇠가 있다. 어떤 분야는 배울만큼 배우면 작별해야 하고, 어떤 분야는 배울점만 배워서 손을 떼야만 한다. 이 둘의 차이는 아주아주 크다. 첫번째 어떤은 지금도 간접적으로 관망하고 있지만 두번째 어떤은 최대한 멀어지려고 노력 중이다. 현실은 그렇지 못할지라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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