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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Mar 22. 2024

그런 사람 한 명

단편소설 <나머지정리>

표고의 인생작 중 하나는 연수와 함께 완성했다. 그 작품에 연수의 지분은 없지만 연수와 합동으로 전시를 하기 위해 같은 기간 동안 서로의 진행 상황을 자연스럽게 공유하면서 작업했고 그렇게 그들은 따로 또 같이 꽤 오랜 시간을 보냈었다. 가장 가까웠던 순간은 이 프로젝트를 열기 전이었으나 열기가 식기 전에 계속 마주칠 기회가 있었으니 그때 그 공감대는 도자기처럼 단단하게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 어딘가를 찾아내기가 어려울 뿐.


표고는 연수와 다시 친해지고 싶지만 동시에 이미 친할만큼 친해봤기 때문에 굳이 이제와서 잘 보이려고 애쓰지 않고 있다. 그러나 애쓰고 있기도 하다. 뭐랄까. 연수는 참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다. 그건 행동이 엉성해서 뭘 자꾸 챙겨줘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진작 제꼈을 것이다. 그는 그러니까, 마음의 손길을 섬세하게 조절할 필요가 있는데 그걸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이런 것이 궁금하다고 한들, 표고와도 친한 연수의 지인들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다.


괜히 연수 이야기를 하다 옛날옛적의 음담패설이 튀어나와 그(의 명예)에게 스크래치나 내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럼에도 표고는 이제 원하는 정보를 얻어낼 수 있는 시공간을 설정하고 그물을 조이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 이건 진짜 고급 기술인 것 같다. 관계망이 넓고 가십이 드나드는 병목에 산다고 해서 모두가 이런 기술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새삼스럽지만 21세기는 정보사회다. 이걸 단순하게 받아들여 오로지 정보의 인풋만을 줄기차게 하고 있는 사람이 99%일 뿐.




표고는 연수를 보면 반가움을 표하고 싶지만 그것이 팬심으로 여겨지기 않기를 바랐다. 연수라고 모든 여성을 팬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본인을 존중하고 아낀다는 안전함을 느끼는 순간 타고난 도끼병이 고개를 들 수도 있다. 연수는 타인은 물론 자기 자신의 성격과 성향을 분석하는 타입이 아니기에 굳이 누군가를 특정해서 떠올리거나 의미부여하지 않는다.


그는 보기보다 영리하지만, 전형적인 예술가다. 그런데 표고는 모든 가능성을 고려하여 최적의 솔루션을 제공하는 분석가이므로 그녀의 관심목록에 있는 고객이나 지인이 기분파일 경우 승부욕을 발휘해서라도(?) 그들을 만족시키려고 애쓰고 있다. 이것이 자신의 천성을 멋대로 휘두르다 팔다리 잘린(비유적으로) 과거에 대한 속죄일지도 모르겠다. 그보다는 그렇게 인간을 공략하는 연습을 해서 얼마 안 되는 아군을 조금이라도 늘려보겠다는 마음에 가깝다.




  많은 일이 있었고 영신과 지성 사이에서 풀리지 않았던 감정의 소용돌이는 다음해와  다음해까지 지속됐지만 표고의 결정적인(!) 순간을 함께한 사람은 연수였다.  사실을 깨닫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때  순간, 그때 반쯤은 표고를 인정하고 (혹은 기특해하고) 반쯤은 아쉬워하는 ( 기대가 컸음을 드러내는) 연수의 얼굴이 표고의 오랜 여정을 지배하는 하나의 이모티콘이었음을.


얼마전까지도 그녀를 진심으로 알아준 사람, 그녀를 계속해서 인정해줄 사람이 영신 뿐이라고 생각했기에 점점 영혼이 털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영신의 머리카락만 봐도 설레지만 이제는   없다. 그제서야, 연수의 존재가  그녀 자신에게 그토록 힘이 되는지 깨달았다. 우리 모두는 매순간 나의 성장을 기록하고 격려해주는 존재가 필요하다. 없어도   있지만, 있으면 삶의 질이 달라진다.  사람이 나와 동행하지 않는다해도.


그런 사람이 자기 자신의 예술세계를 계속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희망이 넘친다. 표고는 그의 세계에서 경쟁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제는 팬이든 뭐든 될 수 있을 것 같다. 표고는 표고의 세계에서 그와 같은 사람이 될 자신이 있으므로. 표고는 잔소리 없이 격려하고 댓가없이 애정해 줄 선배가 될 마음이 있다. 그런 사람 한 명이 누군가의 생애를 바꿀 수 있기에, 기꺼이 그 한 사람이 되어줄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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