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다시 봄이 오겠지>
그녀들이 어느 시점에 사라졌는지, 그보다는 내가 어느 시점에 사라져서 그녀들이 어딘가를 떠돌고 있었는지 지금은 알 길이 없다. 원래는 지금 다니는 회사에 완전히 정착하기 한참 전, 나름 꽤 오래 일했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던, 조금은 수상한 회사에서 시작된 인연이었다. 갑자기 뜨거운 국물이 생각난다. 그냥 소주가 생각난다고 말하라고? 아니다. 나는 지금껏 단 한번도 소주 그 자체를 열망한 적이 없다. 다만 함께하고 싶은 사람들과 소주가 항상 패키지로 등장했을 뿐.
뜨거운 국물은 해장용이다. 안주는 됐고, 지금은 그 수상한 회사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하필 그때 혜미를 만났다. 요망한 것. 그러니까, 내가 그 회사에서 1년 6개월 동안 헛짓거리를 하는 동안 혜미 이것은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나갔다. 그해 겨울에 휴학생인 척 하고 슬그머니 들어와 1주일 동안 함께 교육을 받은 혜미는 다음 월요일부터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본인이 부재한 둘째주 주말에 갑자기 슬픈 척을 하며 언니들, 그러니까 나와 록시를 불러냈다. 록시가 진짜 휴학생이었다. 그리고 나는 정말로 일을 하러 왔는데, 일을 하러 왔기 때문에 그녀들을 만나서 스트레스를 풀어야 했다. 고기에 소주를 먹었고, 마지막 목적지는 록시가 안내한 클럽이었다. 우리는 매주 그 클럽에 가기 위해 재결합을 했고, 그 후로 클럽에 가기 전에는 고기를 먹지 않게 됐다.
고기는 아침 5시 이후에. 먹을 수 있냐고? 주말 밤의 대부분을 클럽에서 보내고 난 후에는 당연히 먹을 수 있다. 클럽에 다녀오면 당이 땡기기보다는 단백질이 떙긴다. 그렇지 않다면, 그 클럽은 갈 필요가 없거나 적어도 당신과 맞지 않는 클럽이다. 내 말을 믿을 필요는 없다. 단백질덕후의 헛소리일수도 있다.
예상했는지 모르겠지만 록시는 록시 하트의 그 록시다. 록시의 외모는 벨마 켈리와 더 비슷하다. 혜미도 본명이 아니다. 혜르미온느를 줄여서 혜미라고 부른다. 그녀의 본명은 아름이다. 그리고....
"포뇨 언니, 아직도 사표 안 냈어?"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달은 채워보자."
내 이름은 포뇨, 역시 본명이 아니다. 그냥 우리는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 록시가 처음으로 클럽에 데려가기 전, 록시가 아는 형님, 그러니까 오빠가 데려온 형님들, 그러니까 오빠들이랑 삼대삼으로 마주앉아 자기소개를 하는데 갑자기 록시가 자기를 록시라고 소개하는 것이었다. 록시가 진짜로 하게 될 무언가를 우리가 자세히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본명은 비밀아닌 비밀이었나보다. 그래서 생략한다. 아름이는 자기를 혜미라고 소개했는데, 나만 여기서 본명을 밝히자니 너무 고지식해보일까봐 그냥 생각나는대로 암호명을 댔다. 그게 포뇨였다.
"언니는 포뇨보다는 레티랑 닮았는데."
"야, 그건 록시가 더 심하지 않냐."
"오, 나는 별명이랑 싱크가 너무 높으면 더 이상하더라고, 언니가 포뇨인 것도 괜찮아. 반전있고."
"얘는 반전을 너무 좋아해."
"언니들, 사실 혜미는 혜르미온느의 약어야."
"약어? 헤르미온느가 원래 악어였어?"
"언니 일부러 그러는 거지. 크크."
"당연하지, 야. 언니를 뭘로 보고."
형님들이 있거나 말거나 서로의 작명센스를 놀리다보니 어느새 밤 10시가 지나있었고, 록시는 본인이 호출한 오빠 1에게 귓속말을 하더니 나와 혜미를 데리고 나왔다. 혹한기와 꽃샘추위 사이의 녹을 듯 말 듯한 이른 봄바람을 맞으며 뱃속의 취기를 뿜어내고 있는데, 혜미가 조용히 팔짱을 꼈다.
"언니, 지금 갈 거 아니죠?"
"지금? 뭐 했다고 벌써 가? 내일 쉬는데."
"언니 가면 나도 가야하니까, 더 놀아요."
유리문 안을 조용히 바라보던 록시가 다가와서 우리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오빠들한테는 집에 간다고 하고 저쪽으로 가자."
"집에 가는 건 아니라는 거지?"
"클럽 갈건데, 어차피 저 분들은 나이가 안 돼."
"그런데 왜 불렀어?"
"내가 부른 거 아냐. 자기들이 밥먹자고 한거지."
굳이 말하자면 원래는 록시도 이렇게 시간낭비하는 유형은 아니었다. 다만 그날은 의리가 어쩌고 저쩌고...
"인사하고 가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