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행위는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선택

지그문트 바우만 <행복해질 권리>

by 산책덕후 한국언니

도서제공리뷰



행복 추구는 절대로 끝나지 않는다. —행복 추구의 끝은 결국 행복의 끝을 의미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행복이라는 안정적인 상태에 도달하기란 불가능하기에, 주자runner들이 (미미하더라도) 계속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끈질기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목표물을 쫓는 것뿐이다. 행복으로 가는 이 트랙에 결승선이란 없다. -31p



폴란드 출신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1925-2017)은 반유대 캠페인의 절정기에 망명하여 영국에서 거주하였다. 탄생 100주년에 등장한 <지그문트 바우만 행복해질 권리>는 2008년에 출판되었던 저서 <The Art of Life>의 한국어판이다. 소셜미디어가 폭발 직전에 그것이 불러올 결과를 예상한 듯하다.


황금만능주의에서는 얼핏 고리타분해 보이는 조합만 봐도 자본주의보다 긴 역사가 읽힌다. 이것이 매스미디어와 뉴미디어를 거쳐 ‘마치 모든 불행을 돈으로 제거’할 수 있는 것마냥 인간을 현혹하게 됐고 이로인해 인간은 그 어느때보다 더 많은 빚을 지고도 끝내 도달할 수 없는 행복의 뒤통수를 평생 바라보며 ‘상대적 박탈감’만을 느껴야 했다.




그건 행복이 아니다. 행복 추구는 행복 그 자체가 아니며, 추구라는 에너지가 일시적 쾌감일 몰라도 무엇을 추구할지를 ‘스스로 결정하지 않으면’ 잘못된 길로 들어서기 쉽다. 그리하여 불확실성에 특화된 대가, 지그문트 바우만은 고전으로 돌아간다. 내가 누구인지는 내가 결정하며(너 자신을 알라.) 온전히 자신의 결정에 따라 자발적으로 도덕적 행위를 누적해야(도덕이라는 말에 누적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의미있는 삶, 삶이라는 예술 또는 ‘행복’에 진정으로 가까워질 것이다.




유토피아적 도시에는(사실상 모든 유토피아가 도시였다) 다양하고 많은 사회적 위치가 존재했다.—하지만 모든 주민이 각자 배정된 위치에서 안전하고 안정적으로 살았다. 다른 무엇보다도 유토피아적 청사진에는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의 종말이 그려졌다. 말하자면 놀랄 일도 없고, 더 이상의 개혁이나 개편에 대한 요구도 없는, 완전히 예상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그려졌다. 유토피아에 있다고 점쳐지는 ‘좋은’ 사회 혹은 ‘완벽하게 좋은’ 사회란 가장 전형적인 중산층 특유의 불안을 모두 최종적으로 청산하는 사회였다. -111p


‘소크라테스 모방하기’는 자유롭게 독자적으로 자신의 고유한 자아를, 즉 개성과/개성이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을 의미했다. 소크라테스가 그 자신을 위해 창조한 개성이나 다른 누군가가 만들어 실행한 누군가의 개성을 그대로 복사하라는 뜻이 아니었다. ‘소크라테스의 방식대로’ 자기 삶을 산다는 것은 자기규정과 자기주장을 의미했다. 인생은 장점과 단점에 대한 책임이 오로지 그리고 오롯이 ‘작자auctor’ (행위자actor와 저자author를 하나로 묶은 용어, 설계자인 동시에 그 설계의 집행자)에게 있는 하나의 예술 작품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꺼이 수용하는 것을 뜻했다. -181p


불복하면 처벌받을까 봐 두려워 명령을 따르는 과정에서 윤리적 요구에 복종하는 것은 윤리적 요구가 의도하는 도덕적 행위가 아니다. 순종은 비록 그것이 특정한 선행을 하라는 명령에 부응하는 일이라 해도 도덕성이 아니다. 도덕성에는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란 없다.—명령도, 강요도 없다. 도덕적 행위는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선택이자 자아의 행동할 자유가 발현된 것이기 때문이다(자유롭지 않은 인간 존재는 - 이런 모순적 표현이 타당하다면 - ‘도덕적 존재’가 되지 못한다). 역설적이지만(또는 전혀 역설적이지 않지만), 윤리적 요구를 따른다는 것은 윤리적 요구의 강제력을 잊는다는 의미이다. -236p



레퍼런스 많은 책의 장단점을 두루 갖춘 책이나(통찰력이 있지만 따라가기 버거울 수 있음주의) 노명우 교수의 감수와 추천사를 통해 어떤 부분을 취해야 할지 조금은 알 것 같아서 다행이다.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사유하며, 자본주의적 자기계발에 염증을 느낀다면 좀더 이 맛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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