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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Apr 20. 2023

한국계 미국인 여성, 시인이 되다

캐시 박 홍 에세이 <마이너 필링스>

영화라는 장르에 하염없이 빠져들어 시나리오 작가라는 불발된 꿈을 꾸기 시작했던 2005년에 나는 스스로를 '영화 민족주의자'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쇼비니즘으로 묶이는 강한 민족주의와 강한 가부장제는 곧 강한 여성혐오. 항일운동의 잔재가 남았던 20세기에 내면화된, 내 안의 민족주의를 간신히 물리치고 심지어 일본 영화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 의외로 헐리우드가 너무 민족주의적(?)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민족주의를 나의 민족주의로 대응하는 척 했지만, 그때도 한국 영화는 이미 헐리우드를 능가했다. 그 예술성을 국력이 못따라갔을 뿐.



정체성이되 정체성이 아닌

아시아계 미국인


지금은 주로 미국 드라마를 (정치적으로) 분석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있다. 주요 덕질 분야인 영어와 영상예술을 접목한 콘텐츠다. 브런치북으로 일단락 된(그러나 추가 발행하고 있는) 21세기의 미국 드라마 이야기, <무한대 미국일주 미드편>의 키워드는 오바마와 트럼프와 코로나와 해리슨이다.


미국 문화는 뭐든 '주류' 정치의 영향을 받으니 외국인도 넷플릭스만 구독하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미국 드라마는 말할 것도 없다. 물론 지난 세기의 헐리우드는 거의 자본주의 그 자체의 광고 그 자체였고. 덜 상업적이고 그래서 주류 정치의 영향을 덜 받은 매체(독립예술, 순수예술, 시)는 수입이 잘 되지 않는다. <마이너 필링스>를 읽어보기 전부터 차학경 남매를 알고 있던 (재미교포가 아닌) 본토의 한국인이 몇이나 될까? 내가 알기로는 없다.


<마이너 필링스>의 저자 캐시 박 홍은 한국계 미국인이고 흑인, 백인, 갈색피부로 포섭되지 않는 아시안 여성이다. (여기서 갈색피부의 스펙트럼은 전 지구에 걸쳐있다. 인도계 캐나다인 사치 코울의 에세이 <어차피 우린 죽고 이딴 거 다 의미 없겠지만> 참고) 또한 영어문화권에서 영어로, 영문학의 정수인 영어 시, 영어 운문을 전공한 미국 예술가다.




바로 우리에게 필요했던

그 사이다


캐시 박 홍의 <마이너 필링스>에는 얼마 전 다시 소환한 올리비아 랭의 <에브리바디>에 등장하는 작가와 예술가도 중복해서 등장한다. 그간 읽었던 가장 탁월한 동시대 작가들지만, 영국인 여성/퀴어인 올리비아 랭과 미국계 프랑스 이민자 로런 엘킨에게조차 말못할 답답함을 느꼈다. 랭과 엘킨이 해결해주지 못한-해결해줄 수 없는 그 무언가(두 사람 다 북반구 영어권 출신 '백인'이다.)를 캐시 박 홍이 부분적-캐시도 영어권 출신-으로나마 '속시원하게' 풀어준다. (이후에 업데이트 될 비비언 고닉도 인종정체성에 있어서만큼은 '마이너 필링스'가 부족하지만 그녀만의 고독에 대한 서술은 참고하면 좋다.)


한국계, 아시안 혈통의 여성이 자기 입으로 발화하는 부조리를 미술가-캐시는 미대에서 영문과로 전과함-의 눈과 시인의 언어로 접할 수 있다. 오히려 나의 이야기에 가까워 따가울지 모르니 회피하듯 이 책을 먼저 읽지 않고 미룬 것 같다. 먼저 읽은 랭과 엘킨 덕분에 책 보는 눈이 높아졌고 이 책의 진가를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올리비아 랭, 캐시 박 홍, 비비언 고닉, 그리고 리베카 솔닛은 모두 윈덤캠벨문학상 수상자다. 일부러 고른 것은 아니었지만 이들이 취향저격을 했기에, 일종의 지표가 되었다.)  




안주하는 자의 괴로움


유전자 차별은 계급 차별보다 더 치사하다. 그럼에도 더 만연하다. 마치 차별하고자 하는 그 욕구가 지배유전자에 새겨진 것 같다. 인종차별의 지배-피지배 관계는 성차별에도 적용된다. 유색인종 여성은 중복차별-백인 남성과 정반대-의 대상이지만 문제는 이 카테고리 자체가 너무도 다양하고 그 중에서 이성애자 한국 여성은 차라리 포식자다. (지배자인 백인 남성, 백인 여성, 한국인 남성 이외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우리도 지배자다.) 여기까지 생각해본 적이 있다면 캐시의 모순을 알 것이다.


모른다면 알아야 한다.



인종에 관한 이야기는 단순히 수다로 끝날 수가 없다. 그것은 존재론적이다. 그것은 남에게 내가 왜 존재하는지, 내가 왜 아픔을 느끼는지, 나의 현실이 그들의 현실과 왜 별개인지를 설명하는 일이다.  

-37p, 유나이티드


아시아인이 단 두 명인 경우에도 단합은커녕 하나가 다른 하나를 밀어내려고 할 수 있다. 소수자에 배분된 미미한 권력을 나눠 갖지 않겠다는 것이다. 자기는 그 다른 하나와 닮았다는 착각을 당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44p, 유나이티드



인종에 관해 솔직하게 쓰는 길을 찾는 과정에서,

나는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들에 위안을 주고 싶었으나 그보다 더 원한 것은 안주하는 자들에게 괴로움을 주는 것이었다. 부끄러워 움츠러들게 해주고 싶었다. 아마도 내 정체가 안주하는 무리에 해당하기 때문일 것이다.  -92p, 스탠드업


어떤 식으로든 소수자와 거리가 좁아지면 참을 수 없는 불편함이 촉발된다. 갑자기 자신의 백인 정체성이 의식되고, 그 자의식은 자기들의 정체성이 위협받고 있다는 오해를 일으킨다. 뭔가 부당하다고 느끼면, 자기들이 부당함을 당한 것으로 느낀다. 인종적 억압을 인식하라는 촉구를 받으면, 자기들이 억압받는 것으로 느낀다.  -124p, 백인 순수의 종말



여성 예술가는 좀처럼 "교묘히 넘어가"지 못한다. 흑인 예술가는 좀처럼 "교묘히 넘어가"지 못한다. 뺑소니치고도 교묘히 넘어가는 사립학교 부잣집 아이처럼, 교묘히 넘어간다는 것은 그 사람이 무법자라는 뜻이 아니라 법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160p, 어떤 배움


그러나 나는 마치 말이 치유법이 아니라 남을 오염하는 독인 양, 자칫 고통을 언급했다가는 정신적 외상을 또 한 번 입을 뿐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트라우마를 입히게 되는 문화에서 자랐다.  

-213p, 예술가의 초상


때때로 나는 뉴스 기사에서 범죄 피해자가 아시아인이면 일부러 읽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 사건에 주목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하기 싫기 때문이다.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상관하기 싫다. 왜냐하면 분노 속에 방치되기 싫기 때문이다.  

-231p, 예술가의 초상



윤리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곧 역사에 책임지는 것을 의미하므로, 나는 세상이 자기에게 빚지고 있다고 여기는 부류의 백인 남자가 되느니 차라리 빚을 지겠다.  -266p, 빚진 자




백인 남성의 세금으로 공부를 한다고 해서, 정상성을 강요하는 한국인의 세금으로 공부를 했다고 해서 내가 닥치고 내 역할에 순응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생색내는 자와 순종하는 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리.


누가 더 먼저 각성할지는 물어볼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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