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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Apr 25. 2023

산책을 사랑한 도시의 예술가

비비언 고닉,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외로움 앞에 꼿꼿하고 싶은 마음과 타인과 연결되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어떻게도 할 수 없을 때 '거리로 나가 걷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고닉의 에세이를 읽으며 배운다.
-242p, 옮긴이의 말(서제인)


산책덕후의 취향을 저격하는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로 시작해 여성주의자 여성으로 각성한 고닉의 삶을 농축한 두 편의 에세이가 이어진다. 여기까지만 읽어도 윈덤 캠벨 문학상 수상자-리베카 솔닛, 올리비아 랭, 캐시 박 홍-의 글맛은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런데 반전이 있다.


픽션도 아니고 장편은 더더욱 아닌데-글과 글 사이의 온도 차가 확연하다-그 반전과 함께 '응, 고닉은 멋진 작가야.'라는 성급한 일반화의 해체를 겪고 난 후에 이어지는 에세이가, 진짜 고닉이었다.


고닉이 대학 시절에 경험한, 디스토피아 같은 휴양지 알바에 대해 서술한 '똑바로 앞을 보고, 입을 다물고, 온전하게 균형을 잡는 것'을 세 번 읽었다. 이탈로 칼비노인 줄. 그녀의 호텔 식당 알바 경험은 얼마전에 읽은 <이웃집 퀴어 이반지하>에 등장하는 에피소드와 연결됐다. 게다가 그 배경이 되는 곳, 악명 높은 휴양지는 스릴러 소설 '익명작가'에도 등장하는 캐츠킬/캐스킬 산맥이었다. 마치 이 에세이를 읽어야만 하는 운명이라는 듯이.


자기 자신에게까지 잔인할 정도로 솔직한 고닉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래야 다음 에세이를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어서 고닉이 만난 사람들이 등장한다. 익명으로 등장하고 어디에서나 볼 수 있지만 고닉의 레이더에 걸려서 무참히 파헤쳐진 사람들.



아, 이래서 고닉이구나.



다수에 섞여들 수 없는 한 명으로서, 그는 남부에서 살아남을 수는 있었으나 잘나갈 수는 없었다. '흥미로운 사람'으로 향하는 길 중간에서 멈췄고, 그는 '별난 사람'으로 남았다. -24p


도시에서 사회적 유동성이란 '누구도 다른 누구에게서 도망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어디든 대로들은 거리의 삶으로 지나칠 만큼 번쩍거린다. 그럼에도 동네에는 저마다의 개성이 쌓인다. -33p


40년 전에 사람들은 결혼이라고 불리는 벽장에 들어갔어. 벽장 안에는 옷이 두 벌 있는데 너무 뻣뻣해서 저절로 서 있을 정도야. 여자는 '아내'라고 불리는 드레스 속으로, 남자는 '남편'이라고 불리는 정장 속으로 걸어 들어갔지. -41p


만약 동등한 사람 사이의 사랑이 불가능하다면(그건 어쩐지 불가능해 보였다) 사랑 같은 건 필요없었다.

-55p


문득, 나는 그 여자의 사나운 배고픔이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여자가 원하는 것을 얻어낸 방식으로 비니도 자기가 원하는 걸 얻기를 나는 바랐다...근데 그게 뭐였을까? -114p


교양 있다는 게 식탁에서 한 사람이 무조건 무시당하고, 그 일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는 뜻이라면, 네, 제 생각엔 교양 있는 대화는 더 이상 불가능할 것 같네요. -138p


그러니까 저는 내성적인 교수들한테는 지나치게 유명하고, 야망 넘치는 교수들한테는 충분히 유명하지 못하다는 거군요. -198p


외로움이라는 인간 본연의 상태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사람 사이의 단절과 침묵과 소통 불능 상태 같은 "영혼을 죽이는 사소한 일들"의 관행을 어느 정도 묵묵히 체념하고 사는 것이 보통의 삶이라면, 고닉은 그렇듯 절망 속에 갇힌 상태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어 이렇게 묻고 또 묻는 사람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이 사람은 왜 나를 알고 싶어 하지 않지? 저 여자는 왜 나와 친해지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일까? 우리는 왜 이토록 가까워졌는데도 여전히 의견이 분열될까?' 우리는 왜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모습으로 타인에게 다가갈 수 없을까? 왜 조금 더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없는 것일까?

-241p,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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