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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Nov 05. 2022

올리비아 랭의 시선을 따라가 보는 외로운 뉴욕

외로운 도시: 뉴욕의 예술가들에게서 찾은 혼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

고독에 머무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 자체가 하나의 도시라는 것을. 맨해튼처럼 엄격하고 논리적으로 구축된 도시라 할지라도, 도시에 머물게 된 사람들은 처음에는 길을 잃는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 좋아하는 장소와 선호하는 경로들이 집합된 정신적 지도를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들이 똑같이 복제하거나 재현할 수 없는 미궁이다. 그 시절 내가 만들었고 지금도 계속 만들고 있는 것은 내 경험과 타인들의 경험으로 채운 고독의 지도다. -20p


이다혜 작가의 <어른이 되어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는 스릴러 마니아로 알려진 그녀가 '여성'으로서 읽지 못했지만 다시 '여성'으로서 읽으려 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이 담긴 독서에세이다. 그런데 이 책에 호퍼 부부가 등장한다. 올리비아 랭이라는 다른 작가를 소개하면서, 랭의 <외로운 도시>가 폭로하는 '위대한' 남성 예술가의 또 다른 만행을 함께 소개한 것이다. 뉴욕 산책기를 쓰는 동안 <외로운 도시>는 꼭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고독하다는 것은 어떤 기분인가? 그건 배고픔 같은 기분이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잔칫상에 앉아 있는데 자신만 굶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창피하고 경계심이 들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기분이 밖으로도 드러나, 고독한 사람은 점점 더 고립되고 점점 더 소외된다. -25,26p
에드워드 호퍼,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외로운 도시>의 진주인공은 따로 있지만, 일단 호퍼를 통해 고독이라는 도시로 초대를 받았으니 이곳에서 나만의 지도를 만들어 볼 수밖에 없었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서 자기 자신의 오마주를 발견하는 랭처럼, 나도 그랬다. 조 호퍼, 랭과 겹쳐지는 6년 전의 나에게 빙의가 된 상태로 뉴욕 산책기를 쓰고 있었다. 그러다 읽다만 다른 책들을 마무리하고 왔다.


<외로운 도시>의 평행세계이자,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의 확장판이기도 한, 로런 엘킨의 <도시를 걷는 여자들>도 이번 기회에 완독했다. 글을 더욱 날카롭게 쓰기 위해서 읽었지만, 글을 쓰기에는 에너지가 부족할 때도 읽었다. 결국 뉴욕 산책기의 마지막 챕터만 남겨두고 <어른이 되어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까지 완독했다. 남은 것은 <외로운 도시> 뿐이다. 읽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인간이 만들어낸 구조물 속에서 인간이 원자화되는 도시 속 소외를 이 밉살스러운 창백한 녹색만큼 강력하게 전달하는 색은 없다. 그 색은 전기가 등장함으로써 비로소 존재하게 된 색깔이며, 야행성의 도시, 유리탑의 도시, 불이 켜진 텅 빈 사무실과 네온사인의 도시와 뗄 수 없을 만큼 결합되어 있는 색이다. -39p
더 사적인 해석도 가능하다. 조와의 계속된 다툼, 벌주듯 그녀를 멀리 떼어놓았다가 가까이 데려와서 얼굴과 신체를 바꾸어 카운터에서 생각에 잠긴 섹시하고 독립적인 여자로 만드는 것. 이것은 그녀를 그림이라는 말 없는 매체 속에 가둬버림으로써 아내를 침묵시키는 호퍼의 방식인가? 아니면 에로틱한 행위의 하나로, 풍부한 결실을 낳는 협업 양식인가?
-65p
고독한 자는 최소한 1억 명은 넘는다. 호퍼의 그림이 그토록 높은 인기를 누리고 무한히 복제되는 것은 절대 놀랄 일이 아니다. -67p
말을 했지만 오해받거나 알아듣기 못할 말로 취급받는 경험에는 고뇌에 가까운 뭔가가, 혼자 있음에 대한 내 모든 공포의 해심에 곧바로 가닿는 뭔가가 있었다. 아무도 너를 이해해주지 않을 거야. 네가 하는 말을 듣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 넌 왜 적응을 못하니? 넌 왜 그렇게 유별나게 굴어? 이런 상태에 있는 누군가가 언어를 불신하게 되고, 언어가 사람들 사이의 간극을 극복하게 해 줄 능력이 있음을 의심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74p


앤디는 <외로운 고독>의 앞부분에 등장하기에 <무한대 미국일주> 마이애미 산책편에도 등장시켰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앤디에게 이렇게까지 감정이입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마이애미에서 벽화로 보게 된, 캠벨 수프를 들고 있는 이상한 가발을 쓴 아티스트가 팝아트의 대부, 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리고 앤디 워홀이라는 이름도 당연히 들어는 봤지만) 그게 앤디 워홀이었다고? 그렇다면 마릴린 먼로와 그 시리즈와 그 스타일을 만든 장본인이라는 뜻이니 말이다.


아버지 안드레이는 지금은 슬로바키아가 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온 루테니아인 이민자로, 온드레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 언어적 불안정성, 연이어 바뀌는 이름은 이민 체험이 남긴 산물 같은 것이며, 언어와 대상이 안정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편안한 생각을 근복적으로 뒤흔든다. -79p
다름에서 오는 고독, 호감을 얻지 못하는 데서 오는 고독. 연줄과 허용이 작용하는 마술적인 집단 안으로, 사회적이고 전문적인 무리 속으로, 끌어안는 품 안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음의 고독. -84p


남들이 가까이 가려고 애를 쓰는 어떠한 상태에서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애를 쓰는 십 년을 보냈다. 나의 지난 십 년, 가장 기대했지만 처참하게 무너졌고 그것을 티 내지 않기 위해서 앤디처럼 키덜트 코스프레를 했던 삼십 대. 그 시간은 이해받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찬 공갈빵일 수도 있고, 팝아트처럼 팝 하고 터질 포텐 덩어리일 수도 있다.


그 심정을 정확하게 느꼈을만한 사람이 앤디였다. 보다 정확히는 앤디를 대신해 앤디의 삶을 회상하는 랭이었다. 왜 외국인들은 성을 불렀다 이름을 불렀다 하는지 궁금했는데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다. 워홀보다는 앤디가 발음하기 편하고 발음하기 편한 이름이 타이핑하기도 (심리적으로) 편하다. 한편 올리비아는 한국어 기준으로 4음절이고 랭은 1음절이니 게임이 되지 않는다. 올리비아의 애칭을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전까지는 랭 또는 랭 선배(?)라고 부르게 될 것 같다.


자신을 여러 명으로 또는 기계로 변신시키고자 하는 욕구는 또한 인간적 감정, 인간적 필요, 그러니까 소중히 여겨지고 사랑받을 필요에서 해방되고 싶은 욕구이기도 하다. -89p
기계가 된다. 기계 뒤에 숨는다. 기계를 인간적 소통과 연결의 동반자나 관리자로 삼는다. 앤디는 언제나처럼 선봉에, 문화에서 변화의 물결이 파도가 되어 부서지는 정점에 있었으며, 이제 곧 우리 시대를 사로잡게 될 것에 자신을 내던졌다. 그의 애착은 우리의 자동화 시대를 예시하는 동시에 확립한다.

스크린에 대한 사람들의 열광적이고 자아도취적인 집착, 감정적이고 실제적인 삶이 기술적 도구와 이런저런 진기한 장치로 양도되는 과정을 미리 보여준다. -93,94p
군중 속에서 혼자 있기. 동반자를 갈망하면서도 연결되는 데 대해서는 양면적인 태도를 보인다. 실버 팩토리 시절에 워홀이 신데렐라의 혼성어인 드렐라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그것은 다들 무도회에 갔지만 혼자 부엌에 남겨진 소녀 이름과, 다른 인간의 생명의 정수를 자양분으로 삼는 드라큘라를 합성한 것이다. -97,99p


앤디에 이어 데이비드 워나로위츠라는 처음 보는 인물이 등장한다. 앤디와 데이비드가 이 책의 진주인공이다. 스릴 넘치는 사건이 가득하지만 진짜 스릴러는 아니고 역사와 에세이 알러지가 있는 내게도 쉽지 않은 책이었으므로 도움이 될만한 정보를 숨기지 않겠다.


데이비드는 특히 주요 인물이다. 랭은 데이비드를 본격적으로 조사하다가 타임스퀘어의 역사를 파헤쳐야겠다는 직감을 느끼고 앤디 워홀의 정신세계에도 더욱 가까이 접근했을 거라고 추론해본다.


나는 익명이 되고 싶었다. 눈에 띄지 않은 채 군중 속을 지나가고 싶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은폐된 상태로, 나의 고통스럽고 근심 가득하며 지나치게 선언적인 얼굴을 타인의 시야로부터 숨긴 채, 무관심해 보여야 하고 더 나쁘게는 매력적이어야 한다는 부담에서 놓여난 상태로 말이다.
가면과 고독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명배한 대답은 그것들이 노출에서, 보여지는 부담에서 해방해준다는 것이다.

독일어로 하면 maskenfreiheit인데, 가면이 주는 자유라는 뜻이다. 면밀한 응시를 피하면 거부당할 가능성을 회피할 수 있지만, 그와 동시에 받아들여질 가능성, 사랑이 주는 위안마저 거부하는 것이다. 가면이 신비스럽고 불길하고 불안을 일으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슬프게도 하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134p


이해받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은 상태였다. 이해받지 않아도 되는 상태를 갈망한다. 그러나 이해받지 않아도 되는 상태는 끝없는 무관심의 세계이다. 아무 계단에 앉아서 3일 동안 멍을 때려도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다는 맨해튼의 어느 지역처럼.


그러나 서벌브라고 해서 이웃을 염탐하고 가십을 퍼트리고 오지랖을 떠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나친 관심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위기의 주부들>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바로 나의 세계, 정과 가십과 오지랖의 민족이 다소 배타적인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한국 사회가 그 확장판이기 때문이다. 뉴욕 주변의 신도시는 각 가정의 프라이버시를 지나칠 정도로 존중했다. 아래층의 가정폭력을 경찰에 신고해도 안 먹혀서 고3 카드를 들이밀며 화를 내야 했던 서울 주변의 신도시처럼.



그곳은 나중에 데이비드가 '깔끔하게 관리된 잔디밭의 우주'라 부른 곳, 여성/동성애자/아이에 대한 실체적/정신적 폭력이 아무 영향도 남기지 않고 시행될 수 있는 곳이다. -141p
유년시절이 흔적을 남기지 않았을 리가 없다. 해로운 부담감, 잘 처리하지 못했다면 어떤 식으로든 은폐되거나 그대로 등에 지고 다녀야 할 부담이 없을 수 없다. 우선, 그 모든 학대와 방치의 후유증, 자신은 아무 가치가 없는 존재라는 느낌과 수치심과 분노의 감정이 있었다. 남과 다르다는 느낌, 어떤 식으로든 열등하거나 튀어보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분노가 타올랐으며, 그 아래에는 사랑받지 못한다는 감정이 꺼뜨릴 수 없는 불씨처럼 깊이 감춰져 있었다. -147p


사랑과 자존감이 부재하는 자리는 텅 비어있는 공간이 아니다. 행복한 에너지가 응당 있어야 할 곳에 그것을 억지로 떼어낸 흔적이 있다면 그 자리는 활활 타오르는 마음의 전쟁터일 것이다.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은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 유전자의 본능이다. 그런데 치유 과정을 촉진시키는 의약품이 있는가 하면, 치유를 더디게 하거나 합병증을 일으키는 환경도 있다. 그런 다양성은 어쩐지 21세기에도 잘만 유지가 되고 있다.


치유에 부적합한 환경. 특히 내면의 상처는 눈에 보이지 않기에 치유가 어렵다고들 한다. 거짓말이다. 안 보이긴 왜 안 보여. 많은 이들이 겉모습의 차이로 심리적 상처를 입고, 그 상처로 인해 차이는 해소되지 않고 더욱 공고해진다.


가부장제 사회는 대부분의 여성이 스스로의 신체를 혐오하도록 가르친다. 스스로를 '여성'이라고 범주화해도 이 현상은 넌더리가 나는데, 논바이너리를 포함한 퀴어들은 어떻겠는가. '여성주의'의 태생적 한계일 수도 있지만, 여성주의 자체가 여성의 무언가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 보기에 '여성'이라는 이유로(또는 '여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언가를 뺏기는 상황에 저항하는 사상임을 되새기자.  


가끔 사람들은 물리적인 세계에서 어떤 행동을 취함으로써 정신적인 공간을, 감정의 풍경을 바꿀 수 있다. 그런 것이 아마 예술일 것이다. 워나로위츠가 파괴에서 창조로 점점 이동하면서 곧 시작하게 된 거의 마법에 가까운 예술은 분명히 그랬다. -150p
에이즈가 발생할 경우 이런 성애적 피신처가 맞닥뜨렸을 참담한 결과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도 내 마음속에서 그 부두는 일부일처제라는 번쩍거리는 공장, 둘씩 짝짓고 서로 끌어안으라는 압박, 노아의 동물들처럼 둘씩 어울려 영구적 컨테이너 속으로 들어가 세상으로부터 봉인되라는 압박에서 벗어나 돌아다닐 만한 장소가 되어주었다. 솔라니스가 씁쓸하게 언급했듯이, "우리 사회는 공동체가 아니라 고립된 가족이라는 단위들의 집합에 불과하다."

내가 그런 것을 실제로 가져본 적이 있는지 모르지만, 더 이상 원치 않았다.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몰랐지만, 내게 필요했던 것은 아마 성애적 공간의 확장, 무엇이 가능하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에 대한 내 감각의 증폭이었으리라. -162p


일부일처제는 가부장제만큼이나 구닥다리이고 재미없고 부당하다. 일단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권리'를 무시한다. 영어로는 monogamy라서 꼭 남녀의 한쌍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노아의 방주에는 '번식'을 위한 각 종족의 대표 한 쌍이 타게 되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인구수와 번식과 '출생률'을 연구하는 사회학자나 생물학자도 아닌 보통의 소시민들이 이 걱정을 하게 만드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는 여성을 어떻게든 '들어앉히려고' 혈안이다.


외로운 도시, 아니 무한대 미국일주의 두 번째 여정은 미국 여행 사이사이와 특히 팬데믹 기간에 몰아보기를 했던 미국드라마 이야기가 될 예정이다. 그 시작이 될 <앨리어스>는 2001년에 등장한 21세기 최초의 여전사 시드니 브리스토를 통해서 앞으로의 미드 트렌드를 거슬러 올라가서 보여준다. 그런데 이 엄청난 대작이 시즌 5에서 멈춰버린 이유는 다름 아닌 주인공의 임신이다. 그것이 2000년대였다.


메이킹 필름으로 나오지는 않겠지만 비하인드가 더 드라마틱한 <크리미널 마인드> 오리지널 시리즈는 2005년부터 총 15 시즌을 흥행하고 완결되었다. 제작진이 출연료 후려치기와 시즌 하차 또는 부분 출연 등으로 여성 캐릭터를 체스 말처럼 들었다 놨다 했는데,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액션을 담당하던 남성 캐릭터들이 하차하고 악착같이 버텨낸 여성 캐릭터들이 모든 자리를 차지했다. 이 시리즈는 처음 등장할 때만 해도 '시체'와 연쇄살인에 적응하지 못하는 '여성' 프로파일러로 등장하던 여배우들이 15년 동안 모든 서사를 쟁취해 낸 21세기의 걸작이다.


어느 쪽이 더 한심한지는 모르겠다. 홀로그램만, 허구만 사랑할 수 있는 남자 쪽인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처럼 차려입어야만 사랑받는 여자인지. -175p
"우리는 서로가 소외감을 덜 느끼도록 충분히 열려 있음으로써 모두가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 있어."

이 말은 내가 그의 작품에서 느끼는 것을 정확하게 요약한다. 내가 느끼던 고립감을 그토록 잘 치유해준 것은 날것 그대로인 그의 표현과 취약함이었다. 즉 실패나 슬픔을 기꺼이 인정하려는 태도, 접촉을 허용하는 태도, 욕망과 분노와 고통을 인정하고 감정적으로 살아 있으려는 태도가 나를 치유해주었다.

그의 자기 노출은 그 자체로 고독을 치유하는 방법이었고, 자신의 감정이나 욕망이 유달리 수치스럽다고 믿을 때 생기는 이질감을 해소해준다. -181p


<외로운 도시> 후반부에도 지적 호기심과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는 리포트가 가득하다. 핵심 메시지에 주목하면서 지금 여기 우리의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인 랭의 조언을 전달해본다. 이 책은 심리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실용서가 아니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런 책 보다 훨씬 효과적일 것이라고 자부한다.


어떤 사람들은, 예를 들어 공식적인 매뉴얼로 이해하기 힘들고 공식적인 바운더리에 포함되지도 않는 데다 그 바운더리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소위 일반 정신의학으로 접근에서 치유가 가능한지 모르겠다. 의학이나 의료진을 존중하지만 맹목적으로 따를 수도 없고, 특히 정신 건강의 경우에는 아직도 '스티그마'의 장벽이 매우 높은데 당사자가 드러내지 않는 이상 누구도 알 도리가 없다.


이들은 모두 그녀의 쌓아두는 버릇, 좀처럼 버리는 법 없이 살아온 그녀의 삶을 이야기한다.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돈과 사회적 지위에 관련된 것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극도의 빈곤도 극도의 부도 과도한 소유를 향한 갈망에서 사람들을 자유롭게 풀어주지 못하지만, 정상성의 경계를 넘어서는 이상하고 괴팍한 행동으로 소개되는 모든 경우에서 그런 경계 위반이 결코 건전성의 문제가 아니라 계급적 경계를 어기는 문제가 아닌지 물어볼 만하다. -228p
고독은 받아들여지는 것만이 아니라 융합되고자 하는 갈망이기도 하다. 고독은 아무리 깊이 파묻혀 있거나 방어된다 해도 자아가 부서져 파편이 되고 일부가 누락된 채 세계 속에 내던져졌다는 인식에서 발생한다. 그 부서진 조각들을 어떻게 다시 맞출 것인가? 여기서 예술이 개입한다. 특히 콜라주라는 예술, 반복적인 작업, 하루하루, 한 해 또 한 해, 찢은 이미지를 땜질해 붙이는 작업이 그렇지 않겠는가?
-234p


비비언 마이어는 사후에 예술가가 '되었다'. 그녀의 고단한 인생과 대비해서, 지나간 그녀의 기록이 예술적 가치를 갖고 '팔리는' 현상은 씁쓸하다. 예술은 자기 치유를 위한 활동이자 그 치유 과정을 지켜보게 되는 관객 각자의 정신적인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 온전히 밝혀졌다. 그러므로 예술이 사치라고 주장했던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의 공감능력 부재를 입증했을 뿐이다.


<외로운 도시>에서 콜라주를 하고 바느질을 하고 자기 몸까지 풀로 붙여야 했던 고독한 예술가들은 남다른 정신이 '있어서' 그러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남들에게 없는 요소를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응당 있어야 할 것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스티그마의 원천은 가시적일 수도 있고 비가시적일 수도 있지만, 한번 식별되고 나면 그것은 "타인의 눈에 그 개인을 불신하고 가치를 떨어뜨리는 쪽으로 작용하며, 단순히 차이가 있는 게 아니라 열등하게 보이게 하며...온전하고 정상적인 인간을...오염되고 불신받는 존재로 전락시키는" 작용을 한다.

어빙 고프먼, <스티그마: 손상된 정체성의 관리 문제에 관하여>_250p에서 재인용
고립되거나 집단 따돌림을 받는 스트레스를 계속 겪다 보면 면역 기능이 떨어지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숨기는 행동, 스티그마가 찍힌 정체성을 은폐해야 한다는 사실 또한 스트레스를 주고 고립을 불러일으키며, T세포의 수와 결부되어 에이즈와 관련된 감염증에 더 취약하게 만든다. 스티그마가 찍히면 단순히 외롭고 굴욕적이고 수치를 겪는 데 그치지 않고 죽게 된다. -255p
이미 만들어져 존재하는 주류의 경험은 우호적이고 심지어 시시해 보이기도 한다. 그것을 둘러싼 벽은 거기에 부딪혀 으스러지기 전까지는 보이지 않는다. -281p


안으로 곪아가는 느낌을 알게 되었다. 사춘기 시절부터 말 못 할 비밀이 있기는 했지만, 비밀을 잘 지켜내는 편이 아니라서 처음에는 입이 방정이었고 시간이 갈수록 비밀은 몸에 새겨지고 얼굴에 드러났다. 나는 만 10세에 비혼을 선언했고 12세에 폴리아모리 성향을 발화하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상황은 조금씩 바뀌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별 의미가 없기도 하지만, 대체로 지금도 유효하다.


일부일처제에 순응하는 99%의 보통 사람들이 고슴도치처럼 나를 아프게 해도 안아줄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고독이라는 암에 걸리고 더 아프게 될 것이다. 이미 어느 순간 내재된 스트레스를 드러낸 증상들이 있다. 두 번째 미국여행을 말 그대로 남 부럽지 않게 다녀왔어야만 했던 이유기도 했다. 지금도 젊은 환자의 비율이 꾸준히 상승하고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대상포진. 그때만 해도 지인 중에서 최연소였다. 좋은 것은 하나도 최연소를 못했는데 대상포진으로 최연소라니.


워홀의 작품에 생기를 주는 어떤 흐름이 있다면 그것은 관심 받고 싶어 하는 욕망이다. 그는 모든 사람이 굶주려하진 붙잡기는 힘든 관심이란 것의 정수를 뽑아내려 했다. 명성은 친밀성의 대체물, 중독적인 대체물이었다.
-322p
지구상의 삶의 형태는 시시각각 줄어든다. 모든 것은 꾸준히 더 균질화되고 차이를 관용하는 여유가 더 줄어든다. -324p


뒤늦게 앤디에게 감사하다. 앤디의 작품을 나도 모르게 수십 년 동안 간직해놓고도 몰랐다. 예술가들의 기벽을 나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특히 관심받으려고 일부러 하는 행위 때문에 예술가로 불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어렸다. 그때만 해도 나는 모두가 좋아할 만한 미모와 카리스마로 세상을 정복하고 싶었다. 이것이 가능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정작 가능할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난 이미 아프고 외로운 존재였다. 그보다는 그게 다 무슨 의미냐 싶었다. 대체 왜 관심이 필요하냐고 묻는다면, 내가 안아도 다치지 않는, 고슴도치가 아닌, 진짜 반려인이나 그에 준하는 소울메이트를 만날 가능성보다는 인플루언서가 된 가능성이 더 높으니까 어쩔 수 없다.


상실은 외로움의 사촌이다.
서로 교차하고 중첩하며, 그렇기 때문에 애도의 작품이 혼자라는 감정, 고립된 감정을 유발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죽음은 외롭다. 물리적인 존재는 퇴락과 수축과 소모와 부서짐을 향해 쉬지 않고 움직이는 신체 속에 갇혀 있으므로 본성상 외롭다.

그런가 하면 사별로 인한 고독이 있다.
잃었거나 파괴된 사랑의 고독, 한 사람이나 여러 특정한 사람들을 잃은 고독, 애도의 고독이 있다. -345,346p
잘못된 방식으로 양육되었거나 상실로 인해 원초적인 분리의 경험 속으로 다시 던져진 다 자란 아이나 어른에게서 이런 감정은 흔히 이행 대상에 대한 필요, 심적 에너지를 공급받을 필요, 자아가 수습되고 다시 모이도록 도와줄 수 있는 사랑하는 물건들에 대한 필요를 만들어낸다. -348p


사랑하는 물건들은 말을 한다. 낭비벽뿐만 아니라 아껴 쓰고 남은 물건들에 집착하는 성향마저도 불도저처럼 밀어버린 미니멀리즘의 열풍이 한차례 지나가고 맥시멀리즘이 돌아왔다. 이제는 평생 돌아갈 수 없다고 느껴지는 어느 시점 이전의 상태를 미련하게도 계속 그리워해야 한다. 그래서 그 시절의 물건을 버릴 수가 없다. 이미 버린 것들도 다시 구하고 싶을 지경이다.


헨리 다거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처럼
그는 자신의 분리불안, 상실과 고독의 공포를 견디기 위해 축적하고 수집하고 강박적으로 쇼핑했다.

이것이 유니언스퀘어의 은빛 조각상으로 불멸화한 수집가 앤디,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목에 걸고 블루밍데일의 미디엄 브라운 쇼핑백을 오른손에 든 앤디다.

이것이 찢기는 듯 고통스러운 담낭염 때문에 택시를 잡아타고 병원에 가기 전, 이스트 66번로의 집에서 마지막 몇 시간을 보내면서 귀중품들을 금고에 채워 넣던 앤디, 집 층층마다 속옷부터 화장품, 아르데코 골동품에 이르는 온갖 물건을 담은, 풀지도 않은 꾸러미와 가방 수천수백 개를 비좁도록 놓아두고 떠난 앤디다.-358p


그가 남기고 간 물건들의 목록을 읽을 때마다 운다. 나는 별로 좋게 퇴사하지 못한 회사에서 가져온 클립보드가 그 시절을 떠올리고 세월호를 떠올리지만 버릴 수가 없다. 작년에 세상을 떠난 친구가 남긴 다른 클립보드를 물려받았는데 이 보드의 역할은 한참 전에 끝났지만 버릴 수가 없다. 그런 물건을 버리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낳은 자식이라도 의절하고 싶어질 것이다. 어렸을 때는 나도 그런 자식이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미어진다.


고독의 고통은 은폐와 관련된다. 약점을 숨기도록, 추함을 보이지 않게 치워버리도록, 흉터를 문자 그대로 역겨운 것인 양 덮어버리도록 강요하는 감정에 관련된다. 그런데 왜 숨기는가? 결핍이, 욕망이, 만족감을 느끼지 못한 것이, 불행을 경험하는 것이 뭐가 그리 수치스러운가?-368p
다만 개인적인 행복의 추구가 우리가 서로에 대해서 지는 의무를 짓밟지도 면제해주지도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다정함을 잃지 않는 것, 서로 연대하는 것, 깨어있고 열려있는 것이다. -370p
뉴욕과 예술을 봉합하는 매개로서의 고독을, 올리비아 랭은 너무나 근사하게 직조해내기 때문에, 그녀가 혼자여서 정말 다행이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추천사, 이다혜


데이비드 이후로 남다른 예술가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배경들을 포착하고 타임스퀘어의 역사와 80년대 마녀사냥, 현재의 트위터 시대를 검토하고 다시 앤디에게 돌아온다. 우리가 소셜미디어에 집착하고 여기서 모든 것이 벌어지는 듯한 2010년대 이후의 영화나 드라마들을 보고 있으면 '다들 미친건가?'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아니까 어쩔 도리가 없다.


우리 모두, 고독으로 죽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나의 존재를 알릴 뿐이다. 소셜 미디어가 없어도 되는 경우라면, 다행이고 부럽기까지 하지만 내게 이해받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을 주는 사람들이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 소셜 미디어를 하고 싶은데 테마가 부족하다고 느껴서 못하는 경우라면 (이 상태도 경험을 해봤던 입장에서 봤을 때) 할 수 있는 방법을 어떻게든 모색하는 것, 이 상책이라고 할 수밖에. 이 정도의 관심을 받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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