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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아영 Jun 29. 2019

도망치듯 떠나온 후쿠오카 2박3일 (1)

대책없이 물밀듯 밀려오는 호의 앞에서



술을 좀 많이 먹고 집에와서 침대에 누웠는데 나도모르게 살짝 눈물이 나던 밤이었다. 뭔가 홀린듯 일어나 최저가 항공권 찾는 어플을 켜서는 닥치는대로 훑어보다 후쿠오카 2박3일 비행기 티켓을 발권했다. 대책없고 충동적인 여행의 시작이 만취한 상태였다니.


계획을 세우고 목표대로 움직이고 정해진 일정에 따라 떠나는 것도 좋았겠지만 이번은 조금 달랐다. 그저 이 지긋지긋한 하루들의 반복에 조금이라도 금을 긋고 싶어서 선택한 옵션이었을 뿐. 사실 여행이라는건 가장 쉽게 일상의 균열을 내는 행위인지라 그렇게 술이 잔뜩 취해서도 합법적인 범위에서 선택할 수 있는 최적의 옵션이었던 거다.


사실 여행이라고 이름 붙이기에도 민망한 수준으로 나는 도망을 가고 있다. 도망, 회피, 잠적, 실종.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들이었는데 이제는 침대에 누울 때마다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싶다는 생각을 한다. 하루라도 빨리 현실과 마주해 문제를 해결해야지 싶다가도 그저 아무 생각없이 흘러가는대로 살고싶다. 날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그런데 잊혀지기는 싫어. 아무도 날 찾지 않았으면 싶은 마음과 누구든 만나 하소연 하고싶은 마음이 공존할 수 있다니.




후쿠오카는 부산의 절반 정도 크기의 도시이고 공항과 도심이 가까워 관광하기 좋은 도시다. 보통 관광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하카타와 텐진 근처로 숙소를 잡곤 하는데 나는 도심과 조금 동떨어진 가시이Kashii 라는 동네로 숙소를 잡았다.


이번에 선택한 숙소는 관광하기에는 도심지와 거리가 있고 돌아다니다보니 개미새끼 한마리 안보이는 조용한 동네라 오히려 무서울 지경이었으니 관광에는 적합한 숙소가 아니었다. 이번 숙소는 온전히 에어비앤비의 후기 때문에 결정한 케이스였다. 어쩜 하나같이 후기가 칭찬 일색인데 그 따듯한 말들이 전부 호스트인 치에코 상에게 향하는지. 여기 뭐지.. 술 기운인지 뭔지 홀린듯이 숙소를 뚝딱 결정해버렸다.


에어비앤비 후기가 전부 다 정성스럽고 따뜻했다. 이런 후기들은 처음이야.




무심하게 시간은 가고 후쿠오카로 떠나는 날, 나는 숙소를 도심이 아닌곳으로 잡은 것을 후회했다. 동선이 애매한데, 교통편이 불편하겠네 등의 잡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결제까지 다 해버린 것을 어쩌겠나. 지난 술취한 밤 내 자신을 원망할 수밖에.


그 사이에도 우리의 치에코 상은 내게 숙소 오는 법을 알려주며 본인이 기차역까지 픽업을 나오겠다고 친절한 메시지를 보내왔다. 모르는 사람의 호의는 받을 때마다 뒷목이 빳빳해지는 터라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프로필 사진을 보니 나이가 있어보이는 여성분이셔서 그나마 한 줌 안도했지만 여전히 마음은 불편했다. 그냥 길만 알려줘도 될텐데 굳이 픽업까지 나온다는 치에코 상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며 더불어 불편해진 것이다.


고맙긴 한데 왜 굳이 이렇게까지. 나는 왜 그녀의 호의를 불편하게 받아들였을까. 세상이 흉흉해서 이 시대의 호의는 이면에 뭔가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어서 그랬을까. 그것도 아니면 사실 나는 호의를 호의로 온전히 받지 못하는 사람이었던 걸까.


어쨌든 마음 한켠의 고마움과 찜찜함을 안고 한 시간을 날아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했다. 그 사이 비행기 이륙도 지연되었고 JR 철도 환승에 애를먹어 치에코 상과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30분이나 늦게 약속장소에 도착했는데.


저 멀리서 나를 보며 함박웃음을 짓는 치에코 상. 나도 그녀를 한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꾸밈없고 맑은 웃음을 보니 마음의 울림이 왔다. 숙소 잘 선택했구나.



마침 내가 후쿠오카에 도착한 시간, 소나기가 내렸다. 그녀의 픽업이 없었으면 나는 물에빠진 생쥐 꼬락서니로 숙소에 입성했을 터. 이미 삼십 분이나 나를 기다리느라 차 안의 에어컨은 빵빵하게 틀어져 있었는데 차 문을 닫자 느껴지는 시원한 공기에 몸과 마음이 녹아내렸다. 누군가의 시간을 빚져 나는 이렇게 쾌적한 기분을 느끼는구나. 벌써 그녀에게 빚을 져버렸다.


비가 쏟아진 후 치에코 상의 집으로 가는 길. 녹음이 비를 만나 한층 빛났다.

번화가와는 거리가 있어 한적하고 조용한 동네에 자리한 숙소에 도착했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혀를 내두르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냉장고에서 시로쿠마shirokuma 샤베트를 내어주신다.


이거 어디서 많이 봤는데. 그녀가 냉장고를 여는 순간부터 이 샤베트를 내어주는 장면이 고레에다 히로가츠 감독의 영화 그 자체였다. 걸어도 걸어도 였나, 태풍이 지나가고 였나. 아들이 오랜만에 어머니 집에 찾아갔는데 어머니가 내어주던 아이스크림이 이거였는데. 짧은 영어로 고레에다 히로가츠 영화를 설명했는데 잘 이해를 못한다. 아무렴 어때 영화 한편 찍은 기분이다.


치에코 상은 약도를 가져와 친절히 도심으로 가는 법을 알려주시곤 도심에서 다시 집으로 오는길을 꼼꼼하게 알려주셨다. 구글맵이 있으니 걱정 안해도 된다고 말해도 그녀는 싱긋 웃고는 또 본인의 설명을 이어간다. 매사 충실하게 게스트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그로 인해 힘을 얻는 사람인가보다, 생각했다. 집을 나서려는데 집 열쇠를 주지 않아 물어봤더니 그녀는 “네가 올때까지 기다릴거야. 밤길이 무서우니 10시까지는 오라”고 한다. 내가 원하던 자유여행은 이게 아닌데 싶으면서 순순히 알겠다고 대답했다. 내가 늦게오면 그녀는 그때까지 잠 못자고 기다릴 것이 눈에 선했다. 늦게 들어오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내 선택의 옵션에서 없어져 버렸다.




땀에 쩔은 옷을 갈아입고 6시가 되어서야 비로소 집을 나섰다. 번화가인 텐진으로 나가 구경도 하고 밥도 먹는 코스를 짰다. 숙소와 텐진은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의 거리다. 오며가며 1시간, 밥먹고 구경하다가 10시까지 복귀하기에 빠듯한 시간이다.


설상가상 핸드폰 배터리를 보니 10% 남짓 남았다. 구글맵만 있으면 천하무적이지만 반대로 구글맵 없이는 아무데도 가지못하는 의존증 환자가 되어버린다. 왜 틈틈이 배터리 충전을 안했지. 보조배터리를 가져올걸. 온갖 후회하며 버스에 올랐다.


볼펜 색까지 디테일하게 바꿔가며 버스 정류장을 설명해주었다.

휴대폰 배터리를 아끼느라 아까 친절하게 그려준 치에코 상의 약도를 펼쳐본다. 지나칠정도로 친절한 호의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어디선가는 빛을 발하는 마음이었다. 버스정류장을 세세하게 그려놓은 그녀의 약도에 기대어 텐진 근처 나카스 역에서 하차했다.


나카스 역에서 내려 텐진 중앙 지하상가까지 걸어다니다 만국인의 오아시스 맥도날드에 들러 급하게 핸드폰을 충전했다. 커피 한잔에 전기를 제공받을 수 있는 좋은 세상이다. 꺼지기 일보 직전이던 핸드폰을 겨우 살리고 후쿠오카의 명물 모츠나베를 먹으러 갔다.


1인 모츠나베를 파는 매장. 혼자 온 나같은 사람들에게 딱이었다. 유명세를 타서 그런지 매장에 한국인 밖에 없었다

호기롭게 모츠나베를 앞에두규 맥주도 한잔, 하이보루도 한잔 마시고 일본에 처음 여행온듯한 옆 자리 남학생들의 순수한 대화를 본의아니게 엿듣기도 했다. 1,544엔이 나왔는데 1,600엔 내고 거스름돈을 받지 않았더니 크게 고마워해서 되려 민망해졌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나카스 강가를 걸었다. 후쿠오카의 명물인 야타이(포장마차) 들도 눈에 띄었다. 삼삼오오 모여 퇴근길 술 한잔 걸치는 모습을 구경했다. 저 사람들도 다 각자의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걸까. 길거리 기타 연주가 구슬퍼 한참을 그 근처 서성이기도 했다.


센치한 마음을 접고 편의점에서 필요한 물품을 구입해 재빨리 숙소행 버스를 탔다. 치에코 상에게 “이제 버스 탔다”는 메시지까지 전송 완료. 출발할 때 메시지 보내라는 그녀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엄마에게도 이렇게 동선을 자세히 알려본 적이 오랜데 문득 낯선 감정을 느꼈다.


30여분을 달려 숙소 근처 버스정류장에 내렸다. 치에코 상의 설명을 더듬어 길을 걷는데 정말 이 동네 너무너무 조용하다. 악 하고 소리지르면 온동네에서 쫓아나올 듯한 고요함. 적막함 뒤의 서늘함을 동시에 느끼며 길을 열심히 걷는데 저기 앞에 사람이 한명 서 있다. 가까이 가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 사람.


이 친절한 치에코 상은 기어이 귀가하는 나를 맞으러 마중을 나왔다. 왜 굳이 이렇게까지... 고마움인지 미안함인지 모를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며 그녀와 반갑게 재회의 인사를 나눴다. 집에 들어와서는 피곤할테니 따뜻하게 차 한잔 마시라고 루이보스 티를 내어준다. 대책없이 따뜻한 호의가 물밀듯이 밀려들어오니 나는 숨이차서 어찌할 바 모르겠다.


이번 여행은 도망치듯 떠나온 것이었는데. 어쩌면 치에코 상을 만나러 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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