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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이 훨씬 더 잦아 보이는 날의 신앙

나는 무엇으로 버티는가?

by 코치 루아

고통이 더 잦아 보일 때, 나는 무엇으로 버티는가

하나님의 자녀란, 그리고 소명에 대한 작은 고백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그 어떤 날들이, 인생의 거의 모든 날이라고 하면 과장되지만, 불행이 행복보다 더 자주, 더 크게 찾아오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상담 현장에서 그런 삶을 건너는 분들을 자주 만납니다. 그럴 때, 예수님과 하나님이 떠오릅니다.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오신 분. 인간으로서 억울함과 외로움과 몸의 고통을 실제로 통과하신 분(마 26:37–39; 히 4:15).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십자가가 쉬웠을까요? 복음서는 겟세마네에서의 번민이 나와있습니다. 예수님도 두려웠고,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과 고통을 경험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시지만, 인간으로 오셨으니, 자율적 선택으로 "못하겠다", "안하겠다", 할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번민의 끝에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당신 자신을 내어드리셨습니다(눅 22:42). 두려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과 순종이 두려움을 이겼습니다.(히 12:2). 이 장면에서 예전에는 예수님의 위대함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예수님의 초월성 때문에, 고통 따위는 이길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라면, 그렇게 하겠지 하고 당연시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건, 사랑이 고통을 관통했다는 것이죠!


또 하나 붙잡는 사실: 아버지는 우리를 사랑하사 아들을 보내셨고(요 3:16), 아들은 스스로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요 10:18). 보내신 사랑과 순종한 사랑이 함께 복음의 심장인거죠! 그런데, 저는 왜 “하나님께 감사”는 터져나오는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이미 결정된 사항이고 예수님의 사명이니 너무 당연한 것 아닌가? 그래도, 초월한 존재로 인간으로 오셔서 한 분 하나님의 구원 사역 안에서, 아버지의 보내심과 아들의 순종에서 겸허함을 느낍니다(빌 2:6–8).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롬 8:15–17). 이 정체성은 고난을 가볍게 만들지는 않지만, 고난이 나를 규정하지 못하게 합니다. 억울한 사기와 아픈 배신과 풀리지 않는 빠듯한 형편에서 빠져나가고 있지 못하는데도, 나는 나에게 맡겨진 자리, 오늘의 소명을 향해 작은 순종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엄마로서, 상담자로서, 교육자로서, 크리스찬으로서. 넘어지면 일어나는 그 반복 자체가 믿음의 호흡이 되어갔습니다(약 1:2–4; 고후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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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명리학을 연구하고 명리와 기독교를 융합하여 상담을 하니까 저를 운명론자로 점쟁이로 취급하는 크리스찬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운명론자도 숙명론자도 아닙니다. 그 모든 세상의 질서를 하나님께서 만드셨고, 그런 질서를 동양에서 찾아내려고 했던 옛 선인들의 지혜였고, 누구의 자녀로 태어나버린 것이 결정되어서 어떻게 할 수 없듯이, 세상에는 내가 바꾸려해서 바꿔지는 것도 있지만, 목표가 커지고 세상을 살아갈수록 내가 원하는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신앙은 “주어진 조건”을 부정하지 않고 책임 있게 돌보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태어난 배경과 성향, 지금의 형편은 기정사실일 수 있지만, 그 위에 어떤 선택과 사랑을 쌓아갈지는 은혜 안에서 열려 있습니다. 우연히 벌어지는 많은 일들 속에서 내가 잘해서 모든 것이 잘 되었고, 내가 못해서 나의 어떤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 우연 또한 하나님의 질서 안에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험과 실패의 결과 역시도 하나님의 주권안에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백하는 것과 동양에서 선인들이 찾아낸 우주의 질서를 통해 이런 질서를 주셨겠구나! 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뭐가 다른가요? 점쟁이가 어떤 신의 말을 듣고 전달하고 현혹하는 것이 잘못이지, 사주가 잘못된 것이 아니고 사주를 읽어내는 방법론이 되는 명리학이 운명론은 아닙니다. 어떤 점쟁이가 말하는 신점을 믿고 따르는 것과 타로카드로 방향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은 정말 신앙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점성학, 명리학을 학문으로 연구하고 해석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질서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를 연구하고 증명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또한 고백입니다. 사주는 그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와 사명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듯, 우리는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 직면을 통해 소명을 살아갑니다. 때로 고통은 기쁨으로 즉시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받는 자녀의 확신은 우리를 낙심의 끝에서 붙들어 줍니다(롬 8:31–39).

오늘 나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아버지, 보내신 사랑을 기억하게 하시고, 예수님의 순종을 닮아 작은 오늘을 성실히 살게 하소서. 불행이 더 잦아 보이는 날에도, 사랑이 두려움을 이기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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