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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연 Jan 30. 2022

우리 할머니

[책]슬픔의 위안

"나래는 어렸을 때부터 머리에 땀이 많이 났어. 성당 가는 계단이 높은데 얘가 어찌나 잘 올라가는지 몰라. 아침에 손을 잡고 그 계단을 한참 올라가다 나래를 보면, 묶은 머리끝으로 땀이 똑 똑 떨어졌다니까."


우리 외할머니가 기억하는 나는 그랬다. 할머니가 성당 같이 가자고 하면 쪼르르 잘 따라가는 손녀. 계단도 오르자 하면 어른들 오르는대로 열심히 따라가는데, 머리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히다 못 해 꽁지머리로 땀방울이 떨어지는 아이.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돼도 할머니는 이 이야기를 간간히 하곤 했다.


내가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어도 우리 외할머니는 매일같이 곱게 화장을 하고 지웠다. 내가 거실 소파에 누워있으면 저녁 즈음 할머니는 무릎 높이쯤 되는 화장품 바구니 위에 동그란 탁상거울을 꺼내놓고 앉으셨다. 베란다 창으로 뉘어 들어오는 햇빛 아래에서 할머니는 그 당시 클렌징크림 같은 것을 검지와 중지로 움푹 찍어내 양 볼, 이마, 코 그리고 턱에 올렸다. 양손 검지와 중지로 동글동글동글 얼굴을 마사지하듯 문지르곤 티슈 같은 것으로 그것을 닦아냈다. 그리곤 비슷한 손놀림으로 두어 가지를 얼굴에 더 발랐다.


자그마한 우리 할머니는 성당의 그 긴 의자에 앉으면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언젠가부터는 성당 미사보는 동안 앉아있자면 허리가 여간 아픈 게 아니라고 했다. 조금씩 더 쇠약해지던 우리 할머니가 성당에 가는 횟수는 줄었고, 침대에 누워 라디오를 듣는 시간이 점점 더 많아졌다.


내가 수능을 본 다음 날. 하느님이 우리 할머니를 하늘나라로 데려갔다. 아직도 수능 끝난 그날 밤 할머니를 보러 안 간 게 후회스럽다. - 나 수능 잘 봤어! 내일 갈게 할무니. 하지 말고 그날 갈걸 그랬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도 할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핑 돌았다.


10년이 지났을 즈음엔 괜찮았을까. 그날은 심리극 연수가 있던 날이었다. 할머니의 죽음이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며 죄책감에 빠져있는 6학년 학생의 사례를 다루는 날이었다. 그 6학년 학생 역할을 맡기려 관객을 끝에서 끝까지 주욱 둘러보던 심리극 리더 선생님은 내게 눈을 맞췄다. 선생님은 극무대로 나를 초대했다. 선생님의 촉이란. 네, 제가 하겠노라 앞으로 나가 6학년 학생의 의자에 앉았다. 역할에 집중시키기 위해 선생님은 이것저것 천천히 질문을 했다. 이름이 뭐예요. 몇 살이에요? 무슨 초등학교 다녀요? 역할에 맞게 대답을 하곤 난 우리 할머니를 떠올렸다.

할머니하고 많이 친했어요?

- 네, 엄마 아빠가 맞벌이하셔서 할머니가 많이 키워주셨어요.

할머니 보고 싶겠다. - 네, 엄청.

할머니가 해주셨던 음식 중에 제일 기억나는 건 뭐예요?

- 식혜, 요.

극이었지만, 나의 진심이 담겨버렸다. 여기까지 말하곤 관객석을 돌아봤는데, 눈물이 뚝, 떨어지는 선생님이 보인다. 이 선생님도 떠나보낸 누군가를, 그와의 그 사소한 무언가를, 떠올리고 있겠구나.


묶은 머리끝에서 땀방울이 똑 떨어지던 시절부터 할머니하고 엄마하고 부엌에서 엿기름을 만들 때면 할머니는 나한테 식혜 만드는 법을 몇 번이고 알려줬었다. 나는 기억도 못할뿐더러 아무도 우리 할머니만큼 식혜를 만들지 못한다. 건강을 생각하는 우리 엄마 식혜는 너무 안 달고, 맛있는 걸 좋아하는 큰 이모 식혜는 너무 달다. 그래도 엄마가 만들어주는 식혜를 먹으면 우리 할머니 생각이 난다. 어쩌면, 우리 엄마도 할머니를 생각하며 식혜를 만들었을지 모른다.




[ 슬픔의 위안] 론 마라스코, 브라이언 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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