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에 대하여]
결국 마감시간을 넘겨버린다. 늦은 회의가 끝나고 집에 온 시각 10시 반. 바로 노트북 앞에 앉아서 글을 썼더라면 완성하고도 남았을 시간. 나는 하릴없이 인스타그램을 켜서 몇 분을 낭비하고, 시시콜콜 남동생의 연애 조언을 해주고, 소파에 널브러져 내일 일정을 생각한다. 동시에 ‘어떤 글을 쓰지, 지금 트레바리에 로그인해야 하는데’하는 압박을 느끼면서도 나는 밤 11시 15분까지 꿈쩍하지 않는다.
얼마 전 오은영 박사가 티비에서 말하기를 이건 게으른 게 아니고 완벽주의 성향이란다. 사실 약간은 게으른 게 맞고, 약간은 완벽주의자 성향도 맞다. 글을 잘 쓰고 싶으니까, 완벽하게 쓰고 싶으니까 시작을 못 하는 거다.
그렇다. 사실… 지금 내 머릿속엔 이번 글에서 흉내 내고 싶은 문체가 있다. 고등학교 시절 국어 교과선가 수능 기출문제에서 봤던 수필. 그 수필의 문체다. 백김치 국물처럼 맑고 담백하면서도 깊이가 느껴지는 글이었는데, 실상 내용은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오로지 문체의 느낌으로만 기억하는 글. 그 글처럼 멋들어진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 이 마음이 들었던 첫 순간부터, 글쓰기의 괴로움이 계속 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괴로움을 느끼지 않기 위해 글을 못 쓰고 싶느냐, 그건 더욱 싫다. 그럼 글을 적당히 쓰면 되겠느냐, 그것도 싫다. 글을 왜 잘 쓰고 싶은가 묻는다면 그저 나의 오래된 욕망이라고 하겠다. 글 잘 쓰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은 내겐 우아함과 섹시함의 상징. 내가 언제 거기에 다다를 수 있을지, 다다를 수나 있을지 알 수나 있겠냐마는 그렇기에 부여되는 가치와 더해지는 동경이 있달까.
그렇기 때문에 틈 날 때마다 글쓰기를 생각하고, 어떻게 글쓰기를 꾸준히 -나의 본능적 단발성에 역행하여- 할 수 있을지, 어떻게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게 할지, 연구 보고서든 소설이든 어떻게 또는 누구와 함께 쓸지, 작가의 삶은 어떠할지 생각하고 상상한다. 이렇게 100을 생각하면 1 정도가 글이 된다. 생각하는 99에도 괴로움이 있고, 완성한 글 1에도 괴로움이 있다. 그래도 내가 쓴 글을 보고 있노라면 -여전히 괴롭지만- 기쁨, 부정할 수 없는 기쁨이 있다.
글쓰기를 좋아하냐고 묻지 마시라. 그냥 나는 글을 쓸란다. 아아, 나쁜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