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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moca Dec 15. 2019

시작이 반이라구요?

그럼 제발 시작하게 해주세요



내 목적지는 'Mera Peak'. 히말라야에서 일반인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봉우리이며, '트레킹 코스'로 분류된다. 말인즉슨 걷는 것만 잘하면 오를 수 있다는 얘기다. 정상과 가까운 구간이 약간 힘들지만, 에이전시에 물어보니 별거 아니란다. 어떤 기준에서 별거 아니라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뭐 직원이 그러니 그런가 보다 했다. 높이는 6,476m. 이 정도면 음, 뭔가 해냈다는 뿌듯함을 느끼기엔 나쁘지 않은 숫자다.


기왕 가는 거 봉우리 한 번 찍고 내려오면 더 기쁘지 않을까? 그렇게 내 목적지는 결정됐고, 여행의 묘미 중 하나인 두근거림이 시작됐다. 수화물을 부치는 순간, 비행기에 올라타는 순간, 네팔에 도착해 비자를 발급받는 그 순간, 기대감은 갈수록 부풀어 올랐다. 혼행이 아니었다면 옆의 친구에게 몇 번이고 물어봤을 것 같다. 나 진짜 히말라야 가는 거 맞지?



메라피크 정상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라고 위키피디아에 나온 사진


네팔에는 썩 늦은 시간에 도착했다. 유심을 갈아 끼고 돌아서는 순간 한 현지인과 눈이 마주쳤다. 얘구나. 에이전시에서 나온 친구는 나를 타멜 중심가에 잡은 호텔에 데려다 주었고, 내일 아침 6시에 공항 국내선 터미널로 날 데려다 줄 택시를 대기시켜 놓겠단다. 그렇게 호텔에 짐을 맡긴 후, 우렁찬 천둥소리와 함께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 마냥 비가 쏟아졌다. 근심 가득한 얼굴로 호텔 직원에게 말을 걸어봤다.


"나 내일 갈 수 있을까?"

"루클라까지 가면 절반은 성공한 거야."


사실 그 자체도 맞는 말이긴 하다. 공항이 해발고도 2,860m에 있으니 백두산 정상에서 등반을 시작하는 거나 마찬가지란 말이다. 하지만 루클라를 향하는 비행기가 며칠간 뜨지 않는 것도 예삿일이라고 한다. 지역 날씨가 변덕스럽고 고도가 높아 시야 확보도 쉽지 않은 점, 공항의 유일한 활주로는 산비탈을 깎아 만들어져 조금만 날씨가 좋지 않아도 매우 위험하다는 특성 때문이었다.



사진이 첨부된 포브스 기사 제목이 'Lukla: The World's Most Dangerous Airport'.. 하하..

  

상황이 이래도 잠은 잤다. 내일 아침 날씨는 분명 맑다고 야후가 그랬으니까. 다섯 시간을 자고 일어나니 비는 그쳤고, 구름이 조금 낀 날씨였다. 이 정도면 뜨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공항에 도착해 수속을 밟았다. 그리고 탑승 대기 구역에서 호텔 직원이 싸준 도시락을 까먹었다. 그리고 두 시간을 기다렸다. 수속 카운터로 돌아가 보니 처음에는 없던 공지가 걸려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날씨 탓이었다.


공항 구경은 옛적에 끝났고, 이 기약 없는 기다림은 대체 언제 끝날지 짜증이 나기 시작할 즈음, 에이전시 직원에게 연락이 왔다. 아직도 출발 안 했냐고. 그래. 안 했다. 못 했다. 항공사 직원은 일단 기다리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알겠단다. 아니 이럴 거면 전화는 왜 한 거야..



'300루피' 상당의 아침 도시락(11시 방향 혈액 주머니 아니고 딸기잼임), 다 먹고 손을 씻으러 화장실에 갔을 때 나왔던 물.. 하하..



이후 한 시간을 더 기다렸고, 결국 타멜로 복귀했다. 그토록 부풀었던 기대감과 두근거림은 싹 사라졌다. 에이전시 직원은 나를 한식당으로 데려가 위로라도 해줄 참이었나 보다. 네팔에 온 지 만 하루도 되지 않아 한식이 그리울 때는 아니었다. 대신 직원이 자주 가는 네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혼자 타멜 거리를 돌아다녔다.


타멜 거리는 6년 만이지만 바뀐 건 별로 없었다. 여전히 트레킹 용품점과 종교적 느낌이 물씬 나는 상점들로 가득했다. 여행자들의 거리답게 구석구석에 훌륭한 카페도 그대로 남아있었고, 세계에서 대기오염 수준이 가장 심각한 도시 중 하나답게 매캐한 공기도 그대로였다. 소나기가 빈번하게 내리는 날씨 빼고는 달라진 게 거의 없었다. (직원 말로는 옛날에는 이렇지 않았다고. 기후변화로 인한 이상 현상이라고 했다.)



거리가 익숙해서 그런가 사진도 안 찍었다. 음식 이름은 탈리, 인도식 정식 느낌이다.


호텔로 돌아와 확인해보니 내일 날씨는 흐림이다. 흐리다는 날씨만 봐도 불안해졌다. 내일은 출발할 수 있을까. 물론 이럴 수도 있다는 건 알고 왔다. 하지만 막상 네팔에 와서 시작도 못 하고 있는 상황에 부닥치니, 이건 또 생각도 못 한 스트레스였다. 겸손해야지. 자연 앞에서는 겸손해야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이런 일로 내 감정을 소모하지 말자고 다독였다. 말똥말똥한 눈을 애써 감고 잠을 청했다.


전날 만났던 직원과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고 전날과 다름없이 영겁의 대기상태로 들어갔다. 두 번째라 그런지 기다림도 익숙해졌다. 순식간에 두 시간이 지나갔다. 이게 뭐라고 뿌듯해하고 있을 즈음, 기다리던 탑승 안내 방송이 울려 퍼졌다. 내가 가는구나. 드디어 가는구나. 시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기쁘다니, 헛웃음과 함께 내가 묵었던 호텔 방만한 경비행기에 올라탔다. 아. 드디어 가는구나.



갑니다! 드디어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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