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볼 수 있을까
정상에서는 아무렇지도 않던 두통이 하산을 시작하자마자 다시 들이닥쳤다. 누군가 머리를 비틀어 짜는 듯한 고통 속에서 고도를 낮추기 위해 계속 걸었다. 갑자기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크레바스를 피하느라 걸음은 더욱 늦어졌다. 어찌저찌 캠프에 도착해 가이드가 짐을 정리하는 동안 텐트에서 새우처럼 몸을 말고 누워있었다.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죽어도 롯지까지 내려가 죽겠다는 마음으로 다시 발걸음을 뗐다. 다행히 고도가 내려가면서 통증은 많이 잦아들었다.
카레까지 내려가는 동안에도 눈보라가 몰아쳤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눈보라 속에서 걷는 위화감은 어쩐지 섬뜩했다. 정말이지, 일말의 방향감각도 없었다. 그저 앞선 가이드의 발걸음을 그대로 따라 나아갈 뿐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새벽의 암흑보다 사방이 하얗게 뒤덮였던 이때가 더 아찔했다.
카레에 도착했을 땐 슬슬 해가 지고 있었다. 주방에서 고기 요리를 하고 있었다. 무사히 돌아온 나를 위해 정성껏 준비한 대접 같았다. 감사 인사를 하고 바닥까지 긁어먹었다. 그리고 난로 앞에 멍하니 앉아 있다 눈을 감았다. 몇 시간 전에 마주했던 풍경을 간밤의 꿈을 되짚듯 돌아보았다. 이내 꿈이 아닌 사실이었던 그 풍경 속에서 느낀 감각을 다시 되새겼다. 내가 그 순간 그곳에 있었음을, 그리고 무사히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이제 왔던 길을 돌아가는 3일의 일정만이 남았다. 돌아가는 길은 정말로 다시 볼 수 없는 풍경이 될 테니 더 많이 눈에 담으며 가야 할 것이다. 별이 쏟아질 것 같았던 밤하늘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3일 후면 볼 수 없을 광경이라 생각하니 처음 볼 때보다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돌아가는 발걸음은 정말 가벼웠다. 고테까지 하루 만에 약 1,300m를 내려오는 동안 날씨도 좋았고, 몸 상태는 더 좋았다. 무선 인터넷 카드를 사서 가족과 지인들에게 무사히 하산하고 있음을 알렸다. 사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생각도 못 했다. 내가 이곳에서 카톡을 쓰게 될 줄이야.
가이드가 평소에 하지도 않던 컨디션 걱정을 했다. 갑자기 몸 상태가 어떠냐고 묻더니, 내일부터 날씨가 좋지 않을 수도 있다면서 은근슬쩍 헬기 하산을 권유했다. 몇몇 가이드들이 하산할 때 이런저런 겁을 주며 헬기를 부르자고 한다는 건 이미 한국에서 알아본 바였다. 훤히 보이는 속내가 꼴사나웠지만 웃으며 대답했다. 생각해보겠다고. 물론 일말의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음날, 차트라부로 복귀하는 동안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이전과는 다른 운치가 있어 걷는 맛이 달랐다. 사실 비가 온다는 것만으로 감사했다. 눈이 올 정도로 춥지 않아 쉬는 동안에도 몸이 얼어붙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미끄러운 바위만 조심하면 큰 무리 없는 하산길이었다.
롯지에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도착하기 전까지 헬기로 노래를 부르던 가이드를 더는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내일 함께 출발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안도했다. 싸구려 랜턴을 300불에 넘기려 했던 롯지 주인도 다시 만나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래. 당신도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 먹고살진 않았겠지.
일어나니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있었다. 눈이 펑펑 내리는 아침 일찍이 출발 준비를 서둘렀다. 특히 오늘은 험준한 경사가 많아 눈이 녹기 전에 지나가는 것이 안전하기 때문이다. 눈이 녹고 얼음이 드러나면 길은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해진다고 했다. 예보는 오후까지 눈이 계속 올 것이라 했다. 하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날씨가 바뀌는 변덕스러운 곳인 만큼 해가 나오기 전에 가능한 만큼 속도를 내보기로 했다.
실제로 힘은 들지만 되려 안전했다. 미끄러운 얼음을 밟는 것보다 푹신한 눈을 밟고 가는 것이 훨씬 나았기 때문이다. 푹푹 빠지는 눈길에 다리는 무거울지언정 어느 한 군데 부러지지 않고 성히 내려갈 수 있었다. 트레킹 첫날 묵었던 롯지까지 무사히 도착해 점심을 먹은 후 몸을 녹이고 있었다. 다른 일행의 가이드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어때요? 할만해요?" 깜짝 놀랐다. 너무 유창한 한국말이었다.
한국인 사장님 아래서 오랫동안 일을 했고, 그쪽의 일이 없을 때는 가이드를 부업으로 한다고 했다. 오랜만의 한국말이 반갑기 그지없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눴다.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쉬는 시간을 주지 않았던 한국 사람들 뒷담화를 하며 웃기도 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외로움을 녹여준 고마운 시간이었다.
조금 더 내려가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화창한 날씨가 펼쳐졌다. 히말라야 날씨는 처음부터 끝까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열흘 전에 봤던 낯익은 풍경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여정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실감했고 무사히 돌아온 것에 감사했다. 저 멀리 루클라가 보였다. 이제 정말 다 왔구나.
루클라에 도착하니 긴 꿈을 꾸고 온 느낌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기에 있었던 것 같다. 갑자기 지난 열흘의 시간이 한 조각의 꿈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어떤 날의 꿈보다 더 꿈같았던, 그래서 너무나 빠르게 지나갔던 시간이었다. 혼자 이런저런 감상에 젖어 있을 때, 가이드는 어서 ATM에 가서 내 카드가 되는지 확인해보자고 재촉했다. 원래 주려고 했던 팁도 자기가 알아서 깎아 먹으니 이 친구는 진짜 어쩔 도리가 없다.
에이전시 직원은 카트만두 공항의 활주로가 공사에 들어갔다며 카트만두에서 가까운 지역의 티켓을 끊어줬으니 거기서 지프 셰어를 하고 카트만두까지 알아서 오란다. 그러면서 노 프라블럼. 카셰어링 비용은 자기가 부담하겠단다. 아니 무슨 당연한 얘기를 선심 쓰듯.. 이것도 내가 출발하기 전에 말해줄 수 없었던 일이냐고 물어보니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렇단다. 그래.. 알겠다.. (지금은 공사가 끝났다고 함)
산속에서의 기온과 환경에 비하면 아늑했던 하룻밤이 지나고 아침 일찍 라마찹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사람들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짝을 지어 카트만두행 카풀 그룹을 만들고 있었다. 구경하기 무섭게 다른 여행객들이 내게 말을 걸어왔고 빠르게 그들과 합류했다. 그리고 에이전시 직원이 말한 '카트만두 인근의 공항'에서 출발한 지 6시간 후, 카트만두에 무사히 도착했다.
타멜 거리가 고향처럼 느껴져 헛웃음이 나왔다. 에이전시 직원과 만나 증명서를 떼고, (나중에 더 높은 곳을 오를 때 필요할 거라고.. 과연 쓸모가 있을까..?) 한식당에서 삼겹살을 배가 터질 때까지 먹고, 마트에서 맥주와 프링글스, 유칼립투스 비누를 산 뒤 호텔에 도착했다. 그렇게 11박 12일의 여정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