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3가지 기획 기준.
01. 포트폴리오 작업을 시작했다. 7년 전, 두 눈 뜨고 보기 힘든 기획물부터 최근의 작업까지 한 번에 쭉 훑어보니.. 막막했다. 이력서/자기소개서/포트폴리오. 그동안 받아보기만 했지, 내 손으로 만들어본 건 처음이었다. 이직 새내기란 이런 기분일까.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각이 안 나온다. 실력은 없고, 패기만 넘쳤던 신입 때로 되돌아간 느낌. "그래. 처음이니까 그럴 수 있어!" 정신승리를 시도하다가, 쪼그라들기를 반복하는 요즘이다.
02. 이직을 준비하며 막막해하던 옛 동료들의 얼굴이 하나둘 스쳐 지나갔다. 직접 경험해보니, 비로소 그 감정이 조금 이해 됐다. 나름 위로해준답시고 "에이, ㅇㅇ님이면 누구든 탐내서 데려가죠!" 호들갑 떨던 내 엄지손가락을 조용히 꺾어주고 싶은 심정이다. 다행히 그들은 자기 '핏'에 맞는 곳에 잘 입사해 나름대로 고민을 안고 또 새 회사에 잘 적응 중이다. 그 사실이 퍽 위안이 됐다.
03. 피그마에 페이지를 툭툭 추가했다. 3,4월은 최대 공채 시즌이니까. 3개월 쯤 더 쉬고 싶은 미련을 뒤로하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지금 이 시기를 놓치면 후회하지 않을까?" 어느정도 후회가 남을 것 같았다. 만약 원하는 브랜드가 사람을 필요로 하는 시기가 '지금'이라면? 그래. 하는 게 맞지. (*이성 되찾는 중*)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지. '내가 어디까지 노를 저을 수 있나' 객관화하기에 아주 완벽한 시즌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얼마 전 '회사생활 7년'을 돌아보는 '일 회고'를 진행했다는 사실.
04. 일 회고 템플릿
2월~3월 사이, 마치 장기연애 같았던 회사 생활을 잘게 쪼개보는 시간을 가졌다.
신입 시절부터 매년 정확히 1년 간격으로 어떤 마음으로 일했고, 어떤 성과와 있었는지, 어떤 일의 기쁨과 슬픔이 있었는지 돌아보며 스스로를 위한 일 정리 시간을 가졌다.
혹시 이직을 앞둔 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하여, 나에게 효과가 있었던 6가지 아젠다만 공유한다.
(출처: 기획자를 위한 프라이빗 공간 코너룸) 저작권 이슈가 있을 수 있어 약 20개 중 내가 직접 해보고 좋았던 것만 추렸다.
1) 나의 일 감정 그래프를 GOOD/BAD로 그리기
- 매년 어떤 성장과 부침이 있었는지 연필로 자세히 끄적이기
2) 일 시즌을 3개로 나눠보기
- 에이전시 / 커머스 / 커뮤니티
3) 나와 자주 연결되는 사람들 찾고, 내가 어떤 '필요'를 채울 수 있는지 적어보기
- 작은 디테일에 쉽게 감동받는 창작가들
4) 나의 대표 일 키워드 찾기
- 잘 할 수 있는 일, 칭찬받은 피드백 등을 키워드로 표현해 Keep, Problem, Try로 구분하기
5) 대표 프로젝트 + 어떤 의미가 있었나요?
- A 프로젝트 : 협업하는 법 / B 프로젝트 : 기획 연습 / C 프로젝트 : 고객사 핸들링
작고 큰 프로젝트들 나름대로 각자의 의미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6) 도전하고 싶은 나만의 프로젝트 세팅
저마다의 갭이어
05. "그래서 너가 생각하는 좋은 기획은 뭔데?"
7년치 업무 회고를 하고나니 이 질문에 답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꼭 멋진 말이 아니어도 '난 이렇게 기획하는 게 좋아'라고 바운더리를 세워두면, 회사를 정할 때도 다시 기획을 할 때도 덜 흔들릴 것 같았다.
사실 얼마 전, 옛 동료로부터 병원 마케팅 관련 프리랜서 제안을 받았다. 배부른 소리일 수 있지만, 다음 스텝을 밟기 전 내가 쌓고 싶은 경험이 아니었다. 나만의 기준이 더더욱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된 계기였다.(그래서 페이는 얼마죠?라는 질문은 꺼내지도 않았다. 돈에 흔들리고 싶지 않은 백수의 자존심..)
06. 좋은 기획의 3가지 기준
일단 초안을 작성했다.
적고보니 스킬적인 부분보다는 좋은 기획을 만들기 위한 철학과 환경에 가깝다.
아래 기준은 기획자 윤소정 선생님과 함께한
앤드엔클럽에서 배운 내용들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❶ 세상에 ‘꼭 필요한 브랜드'일 것
기획의 시작은 ‘왜 지금 이 브랜드여야 할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고객에게 ‘확실한 가치’를 주는 브랜드만이 살아남기 때문이죠.
의미 없는 화려함보다 명확한 존재 이유를 가진 브랜드를 기획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꼭 필요한 브랜드'는 브랜더로서의 자부심을 지켜주는 기준이기도 하니까요.
❷ ‘지속가능한 기획’일 것
기획은 ‘멋짐’보다 ‘지속가능성’이 먼저입니다.
브랜드의 본질은 지키면서도, 성장 곡선과 리소스를 함께 고려해
오래 갈 수 있는 실행 플랜을 설계하는 일.
저는 이 지점을 가장 많이 고민하고, 오래 붙잡습니다.
결국 성과는 '지속가능한 기획'에서 나온다고 믿습니다.
❸ 동료와 ‘함께’ 밥먹을 것
좋은 기획은, 좋은 팀워크에서 완성됩니다.
기획이 실행되기까지, 수많은 동료의 손을 거치기 때문이죠.
저는 동료들과 대화하고, 밥을 먹고, 강점을 존중하는 팀워크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같이 일하는 사람이 좋아야, 일 자체도 좋아지니까요.
07. 각 기준을 에이전시 경험에 빗대어 보자면 이렇다.
❶ 세상에 ‘꼭 필요한 브랜드'일 것
에이전시 일을 하다보면 종종 마주치는 장면이 있다.
대표님이 자기 브랜드를 자신있게 소개하지만, 막상 까보면 어디서 본듯한 흔한 제품. 마케팅 전략을 짜기 위해 모였지만 정작 'USP(Unique Selling Point)'부터 의심하게 되는 회의. "와, 이걸 어떻게 살리냐.."싶은 마음을 들킬까 애써 침묵으로 답했던 순간들. 이런 경우, 시작부터 틀렸을 때가 많다. '내가 좋아서' 만든 브랜드. 시장은 그런 이유로만 돌아가지 않는다.
실제로 내가 맡은 친환경 잡화 프로젝트도 그랬다. 좋은 취지였지만, 제품 디자인은 돈 주고 사고 싶지 않았다. 내 프로젝트지만 내가 납득이 안 됐다. 그래서 어느 새 이건 어떠냐, 저건 어떠냐 제품 개발자처럼 제안을 쏟아냈다. 2시간 거리 지방 출장도 마다하지 않았었다.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제품'을 위해.
물론 견적이 올라가는 일은 아니었다. 리소스에 대해 회사, 클라이언트, 나 스스로 눈치를 봐야 했다.
결국 아주 조금 업그레이드된 제품이 나왔고, 그때서야 비로소 마케터로서의 양심을 지킨 느낌이 들었다.
이런 경험이 쌓이면서 확신하게 됐다. 나는, 세상에 ‘진짜’ 필요한 브랜드를 서포트하고 싶다.
브랜드가 넘쳐나는 시대, 삶을 실질적으로 바꾸는 브랜드는 더욱 소중하다. 브랜더·마케터로서의 사회적 책임도 여기에 있다고 믿는다. 고객이 돈 주고 너무너무 사고 싶은 브랜드. 그런 브랜드는 존재 이유만으로도 자랑할 가치가 있다. 앞으로 내가 어디에서 일하든, 어떤 브랜드를 맡든 “이 브랜드는 왜 꼭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당당히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자부심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❷ '지속가능한 기획'일 것
"지속가능한 기획"이 뭐예요?라고 질문하면 두 가지로 나눠서 대답할 수 있다.
하나는 비즈니스의 지속가능성, 두 번째는 콘텐츠의 지속가능성.
첫 번째는 이걸 계속해서 '생존'할 수 있느냐. 목표하는 '매출'을 달성할 수 있느냐에 관한 것.
두 번째는 브랜드의 '코어'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콘텐츠를 100번 반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1번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들어가는 것.
예산을 들여 대대적인 캠페인을 진행했는데, 막상 브랜드인지도 매출도 뭐 하나 제대로 잡지 못한 채 흐지부지 끝나는 경우가 있다. 처음부터 이 기획으로 '무엇을 달성해야 하는가'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그리고 중간중간 체크하지 않으면 꼭 이런 일이 생긴다. 목표는 반드시 정량/정성 두 개가 체크되어야 한다. 그래야 브랜딩+목표를 고유하게 버무린 기획이 나온다.
얼마 전,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점점 성장하고 있다는 한 브랜드의 대표가 “이번엔 너희가 하고 싶은 거 한번 해봐”라고 말했단다. 듣자마자 생각했다. '이건 대표도 지금 뭘 우선해야 할지 모른다는 뜻이다.' 아니면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으니 팀원들에게 자유를 준 걸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주목한 건 거기가 아니다. “이 기획이 우리 비즈니스에 어떤 의미가 있지?” “이걸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지?” 그 고민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흘러야 한다. 그게 지속가능한 기획의 기본이다.
물론, 여기서도 균형은 중요하다. 어디에 힘을 줘야 하고, 어디는 흘려보내야 하는지 늘 회사와 팀의 리소스를 고려해야 한다. 지속가능한 기획은 멋짐보다 판단이다. 리소스를 어디에 쓰고, 어디는 과감히 덜어낼지 냉정하게 골라내는 일. 나는 그게 기획자의 진짜 존재감이라고 믿는다.
❸ 동료와 ‘함께’ 밥먹을 것
'밥심'이란 말이 있다. 말 그대로 밥을 먹고 나서 생긴 힘.
윤소정 선생님의 앤드엔 수업에서 배운 것 중, 새롭게 와닿은 내용이었다.
밥을 함께 나누는 만큼, 팀워크는 단단해진다. 정말 그랬다. 내가 언제 팀원들과 잘 협업했는지 돌아보면 늘 서로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밥을 자주 함께 먹으며 서로를 이해하는 깊이가 깊어졌을 때다.
밥을 나누는 식탁 위엔 관심사가 오간다. 그 관심사는 삶의 이야기로 번지고, 결국 요즘 우리가 하는 일의 고민까지 자연스럽게 풀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깨닫게 된다. 생각은 달라도, 결국 같은 방향을 보고 있구나. 그 이후부터는 일이 훨씬 더 잘 풀리기 시작한다. 협업의 리듬이 맞고, 서로의 강점을 더 잘 보게 된다. 서로를 인정하고 아낌없이 피드백 하는 시간들.
나에겐 퇴사 전, 마지막 8개월이 딱 그랬다. "우리 지금, 최고의 팀워크잖아?" 그 순간이 찌릿-하게 좋았다. 도파민이 솟구치며 '이 팀이 더 좋은 환경에서 일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게 됐다. 그리고 퇴사한 지금, 그 동료와는 '일 친구이자 삶의 친구'로 남아 있다. 함께 밥을 먹는 다는 건, 함께 일하는 시간을 숙성시키고 더 성장시키는 도구였다.
08. 기준을 세우고 나니, 또 다른 질문이 생긴다.
"그럼 이런 브랜드는 어떻게 찾지?"
결국 회사는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르는거 아닌가. 하지만, 그 안에서도 기준은 세울 수 있다.
1) 나에게 '존재 이유'가 분명한 브랜드
내가 자주 쓰고, 평소 좋아하는 브랜드.
'왜 이 브랜드여야 하지?'라는 질문에 이미 스스로 답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2) '지속가능한 기획'의 여지가 있는 곳
지속가능한 기획은 내가 입사해서 만들어도 된다.
대신 그것을 얼마나 '필요'로 하고 있는지
채용공고나 콘텐츠, 대표의 메시지로부터 읽어낼 수 있다.
3) 함께 밥 먹는 분위기를 상상할 수 있는 팀
조직 문화를 보여주는 콘텐츠, 채용공고, 구성원의 인터뷰 등
'회사의 조직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채널을 참고하자.
회사를 보는 기준도 내가 어떤 기획을 하고 싶은지로 정리된다.
09. 쓰고보니 알겠다. 결국 나를 잘 알수록, 나에게 핏한 회사를 찾을 확률이 높다. 퍼스널 브랜딩은 이러한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퍼스널브랜딩을 해서 꼭 내 채널이나 사업을 운영해야 하는 건 아니다. 내가 어떤 일로 기쁨을 느끼고, 무엇에 책임감을 느끼는지 아는 것. 그 이해만으로 어떤 회사가 나에게 '핏'한지 알 수 있다.
10. 기획은 결국 '나'로부터 시작된다.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있어야 그에 맞는 기획, 팀, 회사를 만날 수 있다. 좋은 기획, 좋은 회사, 좋은 팀은 그냥 운 좋게 찾아지는 게 아니라 ‘나를 아는 힘’에서 비롯된다는 걸 이번 포트폴리오 작업을 통해 배웠다. 이 글은 나를 정리하는 글이자, 내 다음을 찾기 위한 작은 신호다. 혹시 내가 기다리던 브랜드가 지금 이 글을 보고 있다면, 우린 서로 좋은 타이밍에 만난 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