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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갭이어 4개월, 회고를 해봤다.

2025년 1-4월을 돌아보며

by 하모니블렌더

01. 퇴사 후 7개월이 흘렀다. 그 중 여유로이 시간을 보낸 건 고작 4개월 뿐이었다. 나도 안다. 직장으로 돌아가면 이 4개월도 매우 비현실적인 쉼이라는 것을. "여유만 생겨봐라. 나 운전 면허 딴다!" 불과 1년 전에는 평소보다 야근만 덜해도 저녁 시간을 확보해 이걸 할거라는 둥, 저걸 할거라는 둥 의지가 넘쳤다. 그 때와 비교하면? 지금의 나는 '시간 부자'다. 그런데 막상 시간이 주어지니 불안과 번뇌에 휩싸여 4개월 중 딱 절반만큼 갭이어를 즐길 수 있었다.


02. 왜 7개월 중 1/3만 즐겼을까? 일단 ‘갭이어'의 고수가 아니었다.

7년 다닌 회사를 퇴사하고 내 맘대로 백수 기간을 '갭이어'로 정의했다. 잘 쉬고 싶다고 얘기했으나 결국 또 '의미있고 생산적인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마음 놓고 푹 쉰다해도 '갭이어'라는 울타리 안에 있으면 뻔뻔하게 잘 쉴 줄 알았는데.. '마음 놓기'가 내 생각보다 어려웠다. 잘 쉬었다 못 쉬었다를 반복하며 대한민국의 '잘 쉬지 못하는 여느 평범한 직장인'에 가까웠다.


아니나 다를까. 갭이어를 선언하자마자 '가족이사'가 나를 기다렸다. 퇴사 후 마무리 해야할 프로젝트도 남아있었다. 다 알고 퇴사했지만 예상보다 더 자질구레한 일들이 남아있었고 불과 며칠 전에도 법인 주소지를 바꾸러 굳이 굳이 서류를 발급 받고 은행에 갈 일이 있었다. 퇴사 후 약 3-4개월은 회사와 퇴사 그 중간 어디쯤 애매하게 머물러 있었다.


여기까지는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03. 이후 4개월은?

- 약속 1T

- 스터디 1T

- 독서 1T

- 편집 1T

- 집안일 1T

갭이어라는 텅빈 그릇에 몇 스푼 복잡하게 넣었더니 무채색의 요리가 되었다. 좌절스러웠다.


04. 상상했던 갭이어 일상을 적어봤다.

- 카페에 앉아 몇 년 전 여행 영상 편집하기

- 혼자 여행 다녀오기

- 보고 싶었던 사람들 만나기

- 보컬 학원 다니기

- 수영 배우기

- 영어 공부 하기

- 하루종일 책만 읽기


리스트를 보니 시도조차 안 한 것들이 많다. 물론, 완료한 것도 있다.

그치만 가장 큰 문제는 '평온한 마음'을 갖기 어려운데 있었다.

겉으로 아무리 ‘갭이어'를 주장해도 실제 삶은 ‘백수'에 가깝기 때문에 더 자주 좌절을 맛보았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마주했다.


05. 왜 그렇게 평온하지 못했을까. 갭이어 전반적으로 불안한 시간을 보낸 이유는 '가벼워진 지갑' 때문이었다. 분명 계산하고 시작한 퇴사였다. 하지만 퇴직금을 늦게 받는 예측이 기정사실화되며 7개월 내내 경제적 불안이 나를 옥죄였다. (다행히 4월 말에 퇴직금을 모두 정산 받았다. 이제는 법인 관련 업무도 거의 없다.)


그제서야 나의 마음이 잠잠해졌다. 백수의 필수 조건은 '경제적 안정'이었다. “돈이 없지 시간이 없냐!” 내가 가진 재산은 '시간'이라며 합리화를 시도했지만 외출할 때마다, 숨쉴 때마다 돈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백수 기간에 정치적 혼란이 크게 올 줄 몰랐다. 지금까지는 정치가 내 소박한 삶을 흔들리 없다고 생각했나보다. 하지만 이번 사회적 이슈가 나를 꽤 불안하게 만들었고, 세계 돌아가는 공부를 좀 하게 되었는데.. 내가 내 삶만 돌보느라 정세에 어두웠던 것인지. 백수인 상태로 온갖 세상의 소식을 정신없이 흡수하다보니 IMF 및 전쟁 썰이 생각보다 현실 앞에 와있음을 보고 불안감을 많이도 느꼈다. 7개월 중 1/3만 평온하게 보냈다는 얘기를 반복하고 있다. (하하)


06. 근데.. 진짜 그럴까? 나의 갭이어는 돈이 궁해서 전반적으로 불안했나? 묻고 또 물었다.

두 번 세 번 끄덕여졌다. 돈 걱정에 불안한 날들이 많았다. 특히 이사와 퇴직금 문제가 맞물려 더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하고 싶은 소비는 다했다. 필요한 만큼 아주 잘~ 소비하며 보냈기 때문에 퇴직금이 늦어질수록 더욱 전전긍긍할 수 밖에 없었다.


오케이. 그럼 돈에 관한 불안을 제외하고 갭이어는 어떻게 보냈지?

하루하루, 한 달 한 달 돋보기를 대고 확대해서 살펴봤다.

그렇게 4개월치 회고를 하고보니 반전이 있었다.


- 미뤄둔 건강검진을 받았다.

평소 잘 가지 않았던 유외과, 산부인과 등 평소 잘 가지 않았던 레어한(?) 건강 검진을 마쳤다.

속이 다 시원했다. "이 병원은 무서워서 잘 안갔던 것 같은데? 평소 여기가 좀 안 좋았던 것 같은데?" 싶은 곳을 들러 검진을 받았다. 아직 몇 개 병원이 남았다. 취업 전에 꼭 가자.


- 7년간의 업무회고 후,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정리했다.

업계동무 스터디를 통해 동종업계 기획자 분들과 공부하며, 스스로 생각 정리하는 시간을 자주 가졌다. 나 자신 및 일에 대한 회고를 몇 개월 동안 여유롭게 써내려갈 수 있었다.


- 백수 기간을 '갭이어'로 정의하고 유튜브를 시작했다.

100% 성공은 아니지만 스스로의 쉼에 '갭이어'라는 이름을 짓길 잘했다. 마음이 조급해질 때면 나의 방향성을 찾는 시간이라며 셀프로 토닥일 수 있었다. 퇴사 전 내가 기획하고 싶은 것들을 떠올리다 가장 최적의 단어를 찾은 것이기 때문에, 취업을 해서도 꾸준히 가져가고 싶은 주제가 되었다.


유튜브는 어쩌다 한 번씩 올렸지만 나의 도전을 응원하는 이들이 있었고, 비슷한 고민을 갖고 살아가는 이들이 많았다. 단기간 빠르게 구독자를 모으려는 욕심보다 사회에 필요한 주제라고 확신했다. 장기적인 관점으로 집중하고 싶은 키워드를 찾은 것에 의미를 두자. (남은 기간 갭이어 유튜브.. 열심히 하자)


- 몇 년간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을 드디어 만났다.

2~7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했던 지인들과 만나 그동안의 소회를 풀었다. 광명/세종에 가서 1박 2일을 하고 오기도 했다. 맛있는 식사와 왁자지껄 수다를 떨며 앞으로도 이렇게 주변 소중한 사람들과 자주 보며 살고 싶다 생각했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잘 꾸려나가고 있는 언니, 오빠들을 보며 동기부여를 받기도 했다.


- 가족이 오래 살 집을 디테일하게 꾸몄다.

이사도 이사지만, 2-3달 동안 집에 필요한 것들을 잔잔바리로 챙겼다. 결혼 전, 가족을 위한 나만의 중요한 프로젝트를 한 기분. 이것으로 K-장녀의 프로젝트를 일단 마친다.


- 영어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10년 전 오픽 성적은 IH 그대로였다. 다행이었다. 이제는 비즈니스 영어를 제대로 배우고 싶어졌다.


- 절친의 아기가 태어났다. 갓 태어난 조카의 성장을 틈틈이 볼 수 있었다.

육아휴직을 갖게 된 친구와 휴식 타이밍이 아주 잘 맞았다. 소중한 시기를 나눌 수 있음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돌아보니 촘촘하게 일상을 잘 보냈더라.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정리하고, 일상을 돌보는 느낌이 좋았다. 가끔씩 불안이 솟았고 걱정에 매몰되었지만 또 금세 괜찮아졌다. 아마도 난 잘 쉬는 법을 배우는 중일지도..!


07. "아가씨의 삶을 즐기도록!" 아기 엄마가 된 절친이 갭이어 내내 나에게 속삭여준 주문이다.

이것저것 다 도전해보고 싶었던 시간을 지나, 육아에만 시간을 쏟아도 체력적으로 다 소화하기 어려워진 그녀는 저절로 단순해졌다. 나에게 '아가씨의 시간'이라는 기묘한 단어를 선물해준 친구 덕에 지금 누리고 있는 이 시간이 '소중하다'는 것을 잘 알아차릴 수 있었다.


08. 한 달에 몇일 쯤 버린 날도 있다. 하지만 막상 갭이어의 일상을 '회고 노트'에 싹 정리하고보니 (경제적 불안을 느낀 것 치고) 나름 잘 보냈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게 되었다. 꼭 알이 찬 시간을 보냈어야만 하냐고. 그냥 좀 풀어져서 쉬면 안되는 거냐고. 아직도 반문하게 된다. 꼭 무언가를 해야만 안심하는 나와 잘 쉬고 싶은 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이것 또한 수용해야 하는 나의 상태다. 불안한 상황 속, 멘탈을 잡으려 무척 노력했던 밤도 결국 나 자신을 위한 밤이었다.


09. 삶에 '구체적인 회고'가 필요한 까닭은 내가 내 시간을 제대로 다시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생각보다 그리 좌절스럽지 않은 나의 일상을 들여다보니 그 안에서 감사함이 피어오른다. 그래. 돈벌지 않으면서 이렇게 몇 개월 동안 좋으면 호의호식 한 것만으로.. 차고 넘치게 감사한 삶이다. 그렇게 나의 갭이어 4개월치를 마무리 하며 앞으로 얼마나 남았을지 모르는 이 시간을 더 잘 쓰고 싶다는 마음 뿐이다.


10. (엄마아빠는 내 속마음을 모르지만) 나에게 남은 갭이어는 앞으로 최대 2개월이다.

원하는 회사에 합격하면 냉큼 달려가겠지만, 일단 마음에 여유를 가져보기로 했다.

재작년 엄마와 다녀온 유럽 여행 편집을 꼭 완료해야지! 그렇게 나는 바보같이 또 다짐한다. 몇 개월 후 회고하며 생각보다 괜찮은 하루하루를 산 것에 또 감사하고 있겠지? 그렇게 언젠가 다시 일하는 나로 돌아가면, 이 시간을 무척 그리워하며 또 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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