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자영, 『말가짐, 마음산책, 2023.
01.
"영어를 아무리 잘해도 하고 싶은 말이 없으면 소용 없어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가 훨씬 중요해요."
20대 중반, 영어 말문을 트기 위해 1년짜리 학원 프로그램을 등록했다. 영어를 잘 하려고 들어간 프로그램에서 헬퍼님의 한 마디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스킬을 배우러 갔더니, 스킬이 중요한 게 아니야? 1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하는 걸 보면 그 때도 지금도 난 여전히 '하고 싶은 말'을 주저하고, 맥락을 잃고, 종종 말을 잃는다. 그렇게 나의 생각을 뾰족하게 가다듬고 주장하는 법을 조금씩 잃었는지도 모른다.
02.
반면 어릴 때의 나는 주어진 몇 개의 단어로 글짓기하며 '이야기'를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메일 회신으로 '하니는 참 글을 잘 쓴다'고 칭찬했던 것을 아직도 기억한다. 10살배기의 내가 지금보다 하고 싶은 말이 더 또렷했다. 귀를 너무 뚫고 싶었던 어린이가 일단 귀에 귓지를 처음 달아본 날.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솔직하게 적어 내려간 일기들.. 유치하지만 솔직하고 자기 주장이 또렷했던 글을 보면 오히려 그 때가 생각 정리를 꾸준히 연습했던 시절이었다.
03.
어른이 된 나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처음 입사를 했을 땐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A가 좋아 A회사에 왔는데 일을 하다보니 A에 대한 호기심과 정체성을 조금씩 잃는다. 상황상 B,C,D가 더 중요해지니 왜 나는 A에 뛰어들고 싶었던 걸까. A는 나에게 왜 중요했을까. 그런 생각들을 하나둘 놓쳤다. 그렇게 주어진 일들을 하나씩 해나가기 바빴다. 그러다 멈칫. 내가 하고 싶은 말, 내 평생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가. 퇴사 전 마지막 6개월은 그 고민에 꽂혀 있었다.
04.
한 회사에서 7년을 일하고, 백수가 되었다. '하고 싶은 말, 살고 싶은 삶이 무엇인가' 멈추고 고민하고 싶었다.
한창 바쁘게 브랜드 런칭을 준비하던 때 앤드엔 클럽, 데스커라운지 홍대 강의로 두 번 자영님을 멀리서 뵙고, 말가짐 책도 읽었었다. 그녀의 '말'에서는 힘이 느껴졌다. 찾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사람.
'스토리젠터'라고 소개하는 걸 듣고, 나는 나를 무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자연스럽게 고민했다.
퇴사 전 6개월 내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찾아 헤매였는데 애매하게 쌓인 나의 시간들 속에서도.. 내가 생각하는 어떠한 기준에 의해 움직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구석에서 작게 빛나고 있었다.
05.
p.21 말을 잘 한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의 생각이 좋다는 말이다. 그러니 말을 잘 하려면 생각이 바로 서야 한다.
첫 번째 욕구는 생각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것. 작게 빛나는 나의 생각이 '언어의 자립'으로 이어지려면 생각부터 연습해야한다. 세상과 연결되며 안에 쌓이는 '나의 생각'을 부지런히 수집해보자. 잠시 내려놓았던 문장 수집 노트를 다시 꺼내자. 트레바리를 신청한 이유도 세상과 연결되며 내 생각을 훈련하고 다듬어나가기 위함이다. 4개월 후에는 조금 더 생각이 좋아지기를..!
06.
p.10 말하기는 육체를 통해 내뱉는 '습관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말에는 일상의 언어와 생각, 가치관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두 번째 욕구는 말을 잘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생각을 열심히 하고, 글도 쓰지만.. 말로써 그 좋은 생각들을 세상에 잘 나누려면..? 결국 나의 삶으로 살아내야 한다. 말을 잘 한다는 것은 말만 번지르르하게 한다고 해서 '잘 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의 자립'은 수많은 비교와 세상에서 쏟아지는 말들 속에서 결국 언어 뿐 아니라,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쓰는대로 살아지는 삶 속에서 완성된다. 말하기는 생각을 토대로 꺼내어지는 '습의 영역'이라는 걸 잊지 말자.
07.
현재 나의 상태는 '세상에 던지고 싶은 말'을 희미하게 찾은 상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볼드하게 던지려면?
반드시 나의 삶도 선명해져야 한다. 과정이 필요하다. 이번 트레바리 모임을 통해 언어의 자립을 넘어 삶의 자립으로 넘어가는 것은 어떤 것일까?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08.
그래서 대체 세상에 던지고 싶은 말이 뭐냐고 묻는다면?
다양한 삶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사회를 만드는 것.
우선 하모니블렌더라고 내 이름부터 정했다. 기획자/마케터로 일해온 나는 다양한 사람들이 한 팀으로 모여 자신의 강점을 마구 발휘하며 하나의 요리를 완성할 때 희열을 느낀다. 돌아보니 리더로서의 내 강점은 '팀원의 강점을 신뢰하는 것'이었다. 기획 결과물 역시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니까 너의 색대로 살아봐요. 우리 사회는 충분히 그것을 받아줄 수 있는 건강한 샌드박스입니다.'라는 메시지를 담을 때 가장 신이 났다.
09.
노력의 일환으로 나의 백수 생활을 '갭이어'로 재정의했다. 갭이어가 왜 10대, 20대에게만 필요해?
30대인 나에게도, 60대인 엄마아빠에게도 필요하지! 갭투자는 하면서 왜 갭이어를 보내는데는 박할까?
그런 의문을 갖고 소소하게 유튜브도 시작했다. 엄마조차 나를 백수로 볼지언정.. 나는 내 시간을 꿋꿋하게 '갭이어'라고 우기며 천천히 하고 싶었던 것을 해보는 갭이어를 보내려 노력 중이다. (물론, 백수가 되어보니 알겠다. 왜 그렇게 불안한지.. 50% 불안, 50% 평온 상태를 왔다갔다 한다.) 그럼에도 '언어' 하나로 내 시간을 재정의하고 자립시켜주는 건 의미가 있다. 내 시간을 백수가 아닌 갭이어로 '리브랜딩'하며 내 태도를 조금씩 조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10.
트레바리 4개월의 시간이 귀하다. 이제는 또 하나의 인풋을 위해 여기저기 달려가는 자기계발을 하고 싶지는 않다. 불안을 연료 삼아 태우기 보다 하고 싶은 말을 더 명료하게 하고 살기 위해 그저 시간을 쌓는다고 생각해야겠다. 영어학원에서 헬퍼님이 건넸던 말에 대한 답을 꼭 찾고 싶다. 내가 고집스럽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그 질문을 멈추지 말아야 훗날 다시 일할 때 덜 흔들리며 기꺼이 기쁘게 일해나갈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