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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다운 바위풀 Oct 08. 2022

사진으로 담은 역사 소설을 만나다

박하선 - <사진가와 열하일기>

무역선에 올라 대양을 돌던 일등 항해사가 사진가가 되었습니다. 다른 이가 보기엔 세계를 누비는 일일지 몰랐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일엽편주에서 내려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욕망이 차올랐다고 합니다. 1) 그렇게 그는 카메라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1989년, 처음 실크로드에 발을 디디면서 시작한 사진 작업은 강산이 세 번은 변했을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오 년을 염두에 뒀던 일은 십 년, 이십 년, 아니 할 수 있는 데까지 한다가 되었습니다. 2)



그의 사진은 단순히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찍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마주할 피사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철저히 공부하고, 어떻게 사진으로 보여 줄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낮과 밤, 사계절, 비 내리고 눈 오는 날처럼 어떤 환경과 조건에서 최상의 이미지가 나올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겁니다.



이런 노력으로 만든 사진이 주는 울림은 대표작인 <천장(天葬)>에서 절절히 느낄 수 있습니다. 2001년 월드 프레스 포토 “Daily Life Stories” 부문에서 수상한 이 프로젝트는 티베트의 고유한 장례 의식을 담고 있습니다. 죽은 이의 육체를 독수리에게 보시하여 일명 조장(鳥葬)이라고도 하는 이 전통은 그전까지는 아무도 카메라에 담지 못했던 순간이었습니다.



사진 1. <천장> 사진집 표지

멀리 내려다 보이는 마을 전경 사이로 천장터에 남겨진 시신과 구름처럼 모여든 독수리 떼가 끼어듭니다. 새가 쪼아 먹기 좋도록 뼈를 부수고 살을 발라내는 천장사의 몸짓에선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 배어나지요. 그리고 생의 마지막 순간을 지나 대자연의 순환 속으로 섞여 들어가는 망자의 모습. 이 사진들을 마주한다면 누구라도 숨을 들이켤 수밖에 없을 겁니다.



오래전 <천장>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감정이 여전히 생생합니다. 무엇을 기록한 작업인지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대면하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얼굴 여기저기로 튀는 피를 맞으면서도 3) 카메라를 놓지 않은 한 사진가의 집념이 만든 결실입니다.



다큐멘터리 사진가 박하선. 혹자는 역마살이라도 끼었다고 할법한 그는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떠돌며 사진을 찍는 작가입니다. 특히 한반도와 대륙을 아우르는 고대/근대사에 관심이 많은 그는 이와 관련한 여러 작업을 발표했습니다. 한국과 만주 지방의 [고인돌]에 대한 기록, 중국에 남아 있는 고구려 유적을 찾아간 [태왕의 증언, 고구려], 그리고 반도 밖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이들을 쫓아간 [조선 의용군의 눈물] 같은 프로젝트 등이 그것입니다. 



박하선은 자신이 사학자는 아니지만, 사진가의 시선으로 기록한 역사 또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직접 발로 뛰어 기록한 순간들을 정리하고 보여주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작업을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진 2. <사진가와 열하일기> 표지.

그런 박하선 작가가 얼마 전 새로운 작업을 선보였습니다. 그가 두 "박"씨의 만남이라고 일컬은 이 프로젝트는 조선시대 실학자 연암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에 나온 길을 사진가 박하선이 따라간 것입니다. 고구려와 발해사 관련 작업을 위해 중국 이곳저곳을 드나들 때 자연스레 박지원과 사신단이 지나갔던 길도 겹치게 되었는데요. 그러한 과정에서 언젠가는 이 열하일기 프로젝트를 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4)



박하선이 되짚어간 사신단의 자취는 대부분 흔적만 남아 있었습니다. 밭으로 변해버린 성터, 형체만 남은 고택과 가는 길조차 지워져 버린 고갯마루에서 박지원이 만났을 정취를 똑같이 느껴보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고북구 장성이나 천하제일관처럼 여전한 위용을 간직한 공간에서도 몇백 년 전, 소국의 사신 일행이 스쳐 갔던 기록을 찾기는 어려운 일이었지요. 



물론 사진가의 열하일기가 쇠락한 풍경만을 담고 있는 건 아닙니다. 고구려의 옛 산성 위로 떠 오른 초승달과 강렬한 눈빛이 담긴 고려보 주민들의 얼굴에선 흐릿하게 남은 영화의 자취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한 줄 한 줄, 한 장 한 장. 박하선의 글과 사진을 따라가면 수백 년 전 그때 그곳에서, 또 수백 년 후 지금 이곳에서 두 박 씨가 보고 느꼈던 감정이 전해져 옵니다. 


사진 3. <사진가와 열하일기> 전시 풍경. 갤러리 류가헌, 2022.


그럼 <사진가와 열하일기>는 지금의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할까요? 저는 박하선이 기록한 연암의 흔적이 우리의 현재와 겹친다고 느꼈습니다. 작가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는데요.


"이렇듯 명나라는 이미 지고 있고, 청나라는 떠오르는 태양이었음에도 대세를 바로 읽지 못한 조선 조정의 우매함이 결국 화를 불러들인 것이다. 명나라가 망한 한참 뒤에도 명의 연호를 쓰면서 숭상하는 일은 계속되었으므로 그 웃지 못할 의리를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5)


연암의 조선과 지금의 대한민국이 묘하게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언제나 틈바구니에 끼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 떠오릅니다. 


사진 4. <사진가와 열하일기> 전시 풍경. 갤러리 류가헌, 2022.


박하선 작가의 열하일기 프로젝트가 조금 더 특별한 이유는 힘든 상황에서 완성한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 다큐멘터리 사진가분들이 옛 만주 등 중국 북동부 지역에 있는 한국사와 독립운동 관련 작업을 하고 계시는데, 지난 몇 년 동안은 팬데믹으로 인해서 진행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더 그럴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고요. 그래서 요즘 같은 시기에 중국에 있는 우리 역사의 흔적을 갈무리한 작업을 볼 수 있는 건 큰 행운입니다.



짧게는 몇 해, 길게는 그 이상을 찍는 다큐멘터리 사진 작업은 장편 소설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만드는 과정도, 완성된 작품도 긴 호흡을 가지고 끌어낸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진가 박하선은 우리 역사의 일면을 주제로 한 장편 소설 몇 권을 완성한 셈입니다. 여기에 더해 그가 관심 있어하는 상고사 작업까지 연결된다면 아마 한반도의 역사를 품은 대하소설이 되지 않을까요? 박하선 작가님이 앞으로도 계속 멋진 작업을 해나갈 수 있도록 이렇게 글로나마 응원합니다.



*각주

1) 윤세영, <한국 현대 사진가>, 사진예술, 2022, p.202~211

2) “[인물 옵스큐라 6편] 사진작가 박하선의 오지에서 담은 인간의 무늬”, 노둣돌, 2020.10.26, https://www.youtube.com/watch?v=yNR8ogHXR3A

3) "천장 취재 보고서" - 박하선, <천장>, 와우, 2002

4) 예향 초대석, 광주일보, 2022. 09. 05 - http://m.kwangju.co.kr/article.php?aid=1662367800743037295

5) 박하선, <사진가와 열하일기>, 에이지커뮤니케이션즈, 2022, p. 82



*참조

박하선 작가님의 글과 사진을 갈무리한 책, <사진가와 열하일기>는 갤러리 류가헌 (https://www.facebook.com/GalleryRyugaheon/, 02-720-2010)에 연락해서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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