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인간의 정체성, 문자의 흥망성쇠

사무인간의 모험-역사속 사무직장인

by 작가 글리쌤

역사속 사무직장인의 정체성


인턴 직원 이사무는 A4용지에 담긴 9월 고객 서비스 방안 월간 계획표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입사한 후 그에게 주어진 일은 주로 서류 정리, 유인물 복사, 월간 계획표 정리, 회의록 정리였죠. 그에겐 읽고 말하기보다는 듣고 쓰기가 주된 일이었습니다.


그의 발밑 휴지통에는 항상 쓰다 버려진 종이가 반쯤 찢어진 채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창의적인 일은 언제 주어지는 거야?!’


이사무는 개인적인 대필 작성까지 요청하는 상사들에 뿔이 났습니다.


‘이 짓거리는 대체 언제까지 해야 돼?’,

‘내가 인간 타자기인가?’


이사무는 아무도 없을 때 책상을 박차고 일어나다가 신용카드 80만 원 인출 알람 문자를 보고는 슬며시 제자리를 잡고 타이핑 준비를 합니다. 사실 이사무는 타이핑을 치는 업무가 왠지 낯설지가 않았습니다. 왠지 오래전부터 해왔던 일로 느껴지고 질려버린 느낌이 들고는 했습니다. 예전과 시대는 변했지만 이사무가 사무원으로서 수행하고 있는 듣고 쓰는 행위는 역사 속 문자의 기원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가르는 기준은 ‘문자 기록’입니다. 동물과 다르게 인류는 문자를 통해 기록을 남기고 문화와 역사를 후대로 이어지게 만들어 왔죠. 문자 기록이 없던 시대 생활상은 유적이나 유물을 통해 가늠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는 짐작입니다. 반면 고대 문화나 시대상은 비교적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가 문자로 남겨지며 자료를 체계화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자는 음성언어에 배신감을 느끼고 스스로 일어섰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록이 없던 시대에 누군가 고기 덩어리 3개를 여러분에게 준다고 약속했다고 해보죠. 지금 시대에도 말만으로 이루어진 구두계약은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여러분이 다음 후손에게 “저 인간이 나에게 고기 덩어리 3개를 주기로 했으니 손자인 자네가 기억했다가 받거라”라고 할 수 없겠죠. 대신 문자가 이 고기 덩어리를 받아주는 계약서 역할을 했습니다.


역사 속 음성언어의 한계는 명확했습니다. 지금이야 녹음을 통해 지방 어딘가에서 이루어지는 사기업 고위 간부와 국정농단 주범의 은밀한 이야기를 시공간을 넘어 고발할 수 있습니다. 문자가 없던 시절에는 어려웠습니다. 결국 문자의 출현은 기억을 보조하고 시공간을 초월하는 도구의 출현이자 약속의 시작이었습니다. 고기 덩어리 3개를 동굴 벽화에라도 그려 넣고 기록으로 남긴다면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람의 멱살이라도 잡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무실에서 일어나는 비 문자적 언어행위는 상대방을 곤혹스럽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사무는 박 부장에게 한 뭉치의 서류를 건넸습니다.


“부장님, 어제 말씀하신 10월 신상품 매출 계획서 작성했습니다.”


박 부장은 서류를 쭉 훑어보고는 말했습니다.


“자네, 어제 내가 말한 것은 한 귀로 흘리고 보고서를 작성한 건가?”,

“내가 말한 것은 지난달 출시한 A상품에 대한 결과물일세.”

“아니, 부장님 어제 분명 말씀하신 내용은..”


이사무는 호랑이 같은 눈과 마주쳐 말끝을 흐리고 박 부장의 이야기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문자화, 문서화’하지 않은 구두 지시는 서로 간의 이해 충돌로 괜한 A4용지 낭비로 이어지고는 합니다.


<쓰기의 역사>에서 기호학자 장 몰리노는 다음처럼 이야기했습니다. “문자는 중요한 것만을 기입하며, 진실과 특정한 연관성을 가진다.” 문자나 기호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떠다니는 상상, 망상과 문화, 역사가 기억하는 가치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힘을 가집니다.


히브리 문화에서 문자와 책은 신의 말을 떠받드는 대리자로서 신성시되었고 이집트 상형문자는 ‘신성한 문자’를 의미했습니다. 고대 이집트 문자는 토트 신의 창조물로 여겨졌고 인간들이 하사 받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신성한 문자를 만들던 아시리아와 바빌론의 필경사들은 높은 계급에 위치했습니다.

반면 고대 그리스는 문자의 힘과 역할을 경계했습니다. 말로 행하는 행위가 자연스러운 것이며 문자는 은밀한 것일 뿐 구술 전통을 해할 것이라 생각했죠. 철학자 플라톤의 경우 문자로 인해 사람이나 문화의 기억력이 확장될 것이라 예견했으나 스스로 행하는 구술 담화력이 약해질 것이라 부담을 느꼈습니다.


어떻게 보면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문자에 대해 더 경계를 한 듯합니다. 소크라테스는 “기술적인 결과물인 문자는 구술 담화의 지혜를 나눌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한 바, 문자에 대해 회의적이었습니다. 이사무에게 어제 했던 말을 뒤집었던 박 부장은 문자보다는 ‘말의 힘’을 과신했습니다. 이사무는 이제 사소한 업무 지시에도 건건이 서면 계약서를 쓰고 싶은 마음일 것입니다.




기억의 확장, 보조 수단을 넘어 세밀한 소통을 위해 인류는 그림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은 프랑스 라스코 동굴,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 속 그림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죠. 2010년까지 발견된 구석기시대 동굴 벽화는 350여 개가 넘으며 우리나라의 경우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가 대표적입니다.


본격적인 문자의 시대로 들어서기 전 생각과 모습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 문자형태의 시초로 볼 수 있습니다. 일각에는 문자에 선행하는 모습과 기능을 하지만 그림문자가 실질적인 문자는 아니라는 시선도 있습니다. 양 단에서 절충해 생각해 보면 어쨌든 그림문자는 ‘문자의 초기 형태’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만성 스트레스를 겪는 현대의 사무 직장인들이 비 언어적 심리치료를 받는 모습은 점점 흔해지고 있습니다. 미술치료를 받으며 그려내는 그림은 마치 언어적 표현이 힘들던 시절 생각의 고리를 연결하려 안간힘을 쓰는 구석기 원시인과 같습니다. 언어적인 표현이 만연하고 이모티콘이 난무하는 요즘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 심리치료를 통해서만 겨우겨우 비를 맞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문자는 발달했지만 사무적으로 쓰이는 문자언어 외에 자신의 생각을 오롯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자신만의 문자는 발견하기 쉽지 않습니다.



흔히 사무원들이 작성하는 보고서를 비롯한 문서를 들여다보면 텍스트의 질과 양에 따라 양 극단의 세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기술한 내용이 고차원인지 저질인지, A4 한 장을 채우는지 아닌지, 표현 언어가 세련되었는지 아닌지에 따라 결재가 되고 혹은 반려됩니다. 문단, 단락, 문장, 단어의 배열과 분할에 따라 이것은 통과 대상이고 저것은 통과하지 못합니다.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문자는 단지 쓰기의 생산물로 치부되었습니다. 띄어쓰기가 서툴렀던 이사무의 보고서에 열을 올리던 박 부장도 고대 그리스에 태어났다면 띄어쓰기에 관대했을 것입니다. 그리스어 텍스트를 보면 띄어쓰기 개념 없이 연속된 문자열로 나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글을 적을 때 써나가는 흐름을 방해하는 띄어쓰기 깥은 자질구레한 요소는 모두 버려졌습니다. 문자 사이에 공백이 적었고 구두로 뱉는 소리와 일치하지 않는 문자도 기록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진화론자들은 원시, 야만 시대에서 문명사회로 발전한 이면에는 ‘문자’를 읽는 능력이 주요한 역할을 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문자’가 사회 구조를 떠받드는 획기적인 전체적 발전을 도모한 것은 아니나 사회 변화의 촉매제 역할을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문자의 발전과 변화에서 일정 단계를 구획 짓는 것이 무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크게 문자의 3가지 종류인 음절 문자, 표어문자, 알파벳 문자 모두 각각의 특정 언어권, 문화권, 사회권에서 특정적인 역할을 수행해 왔습니다. 문자 진화의 상호 우위성보다는 여러 사회에 적응한 각기 다른 문자 고유의 특성이 묻어나는 데 의의를 두고 있죠.

문자의 흥망성쇠는 강력한 사회력을 구성한 국가의 존망과 함께해 왔습니다. 원고지에 글을 쓰던 사람, 타자기로 전보를 써 부치던 사람, 키보드로 보고서를 타이핑하는 이사무, 모두 역사의 한편에서 문자로 기록을 남겨왔고 남기고 있습니다. 흡사 문자의 쇠퇴와 변화는 입사, 승진, 퇴직이라는 3대 명제를 떠안은 예비 직장인과 사무원들의 생존 모습과 묘하게 겹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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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인간의 모험, 요약연재 2화는 다음 주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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