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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글리쌤 Sep 18. 2018

사무인간의 태동기

사무 직장인은 어떻게 진화했나 

사무인간, 본연의 업무에 눈을 뜨다 


인턴직이었지만 야근은 불가피했습니다. 이사무의 책상에 쌓인 서류들은 쉽게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자료 입력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그림을 그리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그저 엑셀 칸에 입력할 내용을 끼워 맞추기 바빴습니다. 저녁 8시, 정규 퇴근 시간을 넘기고 나서야 오늘 하루 분량을 겨우 마쳤습니다. 

기가 막히게 다시 건너오는 파티션 너머의 손. 내일 분량을 미리 전달해 주는 박 부장은 인터넷 기업 정보를 취합하라는 업무지시를 내렸습니다. ‘언제쯤 내 생각대로 창의적인 일을 할 수 있을까?’ 이사무는 곰곰이 생각에 빠졌습니다. 쓰기 노동에 지친 고대 그리스 필경사들도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차츰 중세 시대로 넘어오며 필경사들의 업무에도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이탈리아 신학자 보나벤투라(Bonaventura, 1221(?) ~ 1274, 이탈리아)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타인의 것을 받아 적되 아무것도 덧대지 않고 
바꾸지 않는 사람이 필경사이다”

   
필경사의 업무 성격을 잘 대변해주는 말입니다. 필경사는 ‘생각이 반영되지 않은 쓰기’를 해야 했고 할 줄 알아야 했습니다. 보나벤투라의 말만 인용하자면 필경사의 업무가 제한적으로 보이죠. 사실 대부분의 필사가 수도원에서 이루어졌지만 중세 사회 전반적으로 보면 필경사의 역할은 각 분야에 고르게 분포되어 있었습니다. 

사무국 서기는 회계부터 각종 법제 규정을 기록했고 법원 서기는 공증, 심문, 소환 관련 문서를 작성했습니다. 상인 조합 사무소, 시의회로 영역을 넓히자면 고대 그리스의 일반적인 필사 영역을 초월했습니다. 영역은 넓어졌지만 쓰기의 본질이자 목적은 ‘문서의 기록’이었습니다. 업무 범위나 영역을 막론하고 공통점은 필경사 자신의 문서가 아닌 타인의 문서를 기록한다는 것이었죠. 
  
12세기까지 필사 작업은 수도원에서 대부분 이뤄졌습니다. 필사 작업을 진행한 사람들이 수도사였는데 그중 글을 쓸 줄 모르는 사람은 제외됐습니다. 수도사들은 말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 필사를 하는 이유가 말할 필요를 줄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당시 필사 작업은 초기 화이트칼라에 대한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선망이나 지적인 탐구를 동반한 업무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수도사들이 밥을 짓거나 못을 박는 행위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학문 연마보다는 기술론에 가까웠습니다. 
  
중세 전기 필사본을 원하는 주문자는 다채로워졌습니다. 책 제작을 요구하는 성직자, 평신도부터 수도원장, 교회에서 필요한 서적 제작을 요청하는 주교들이 늘었습니다. “중세를 나타내는 예술의 본질은 주문 예술에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특히 종교와 관련한 물품은 주문제작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퇴근 시간이 지나서까지 일에 매여 있는 인턴직원 이사무에게 야근수당은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중세 시대 필경사들에게도 길게는 2~3년 이어지는 업무에 대한 지원이 필요했지만 미비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고액의 주문제작을 맡은 필경사에게 후원자는 생계비를 지급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 생계비에는 주문 제작에 필요한 비용과 필경사의 자유를 제한하는 명목 또한 포함됐습니다. 고대 시대 작가처럼 필경사에게 글을 읽어주는 제한적인 역할에서 벗어나 책 표지, 염료, 잉크, 양피지의 품질에 대해 세세하게 관여했기 때문이죠. 


요즘 인쇄소에 제본을 맡길 때 원본이 필요하듯 중세시대에도 필사 작업을 하려면 원본이 필요했습니다. 사실 원본을 입수하기 전에 중요한 작업이 필요했죠. 필사할 기록지를 구하는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복사기에 A4용지가 들어있지만 중세시대 필경사의 골칫거리 중 하나는 기록지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중세 전기에는 농경사회에 걸맞은 기록지를 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물의 가죽이었죠. 

소, 양, 염소의 가죽이 이용됐는데 10세기 전후까지는 염소, 그 이후에는 양, 송아지 가죽을 애용했습니다. 사무 작업을 하기 위해 A4용지를 직접 만들어 쓴다고 상상을 해볼까요. 이미 글을 쓰기 전에 기력이 소진되겠지요. 그만큼 동물 가죽으로 양피지를 만드는 작업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예전 필사본을 재활용하는 경우 수고를 덜 수 있었습니다. 지금 사무실에서 이면지를 쓰는 모습과 비유를 해볼 수 있겠습니다. 
  
중세에도 작가와 필경사의 2인 체제 팀워크는 이어졌습니다. 작가가 ‘쓸 거리’를 생산하고 필경사가 ‘쓰는 노동’을 담당했습니다. 여전히 작가들은 구술하는데 중점을 두었고 필경사는 받아쓰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작가가 자신의 생각을 글로 생산하는 일은 드물었습니다. 하지만 13세기 무렵부터는 변화가 생겼죠. ‘쓸 거리’를 생산만 하던 구술가들이 직접 생각을 글로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분업의 경계가 모호해졌습니다.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불편했기 때문이죠.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필경사가 곁에 없으면 기록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말을 받아 적을 인턴직원 이사무가 배탈이 나 결근이라도 하면 대신 엑셀 자료입력을 해야 하는 박 부장의 마음과 같습니다. 그 당시 은밀한 내용의 기록을 위해서라도 작가는 직접 글을 쓰기 원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쓰기는 말을 받아 적는 기록수 단일뿐이었지만 13세기 전후로 텍스트의 품질이 달라졌습니다. 띄어쓰기와 문장 구조의 분할, 글자체의 다채로움이 생기며 글을 읽는 사람들이 ‘시각 효과’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14세기 전후로 일부 계층이 아닌 다방면의 계층에서 글쓰기에 직접 동참하기 시작한 것이죠. 평범한 시민들도 편지를 쓰고 서신 왕래가 잦아졌습니다. 

중세 필경사들의 사무 업무 범위는 증명서, 편지 작성이 많았지만 그 밖에도 연감, 회의록, 회고록, 연대기 작성 업무도 포함됐습니다. 여기에 더해 반복적인 자료 입력에 질렸던 이사무가 그토록 원하던 창의적인 업무도 포함되기 시작했죠.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사실 창의적인 업무라기보다 자료를 모으는 발췌 업무가 추가된 것입니다. 

수도사들은 명상이나 설교, 전도에 필요한 자료가 필요했고 이러한 모음집을 필경사가 발췌본으로 시중에 내놓았습니다. 지금이야 관련된 도서를 키워드로 검색해 필요 자료를 찾을 수 있지만 그 당시 자료를 모아놓은 발췌본의 위상은 현실적 필요 자체였습니다. 정보가 넘쳐흘러 가짜 정보를 걸러내야 하는 현대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중세시대 필경사의 편찬 능력은 돋보이는 것이죠. 


고대 그리스 시대가 구술 우위의 시대였고 쓰기가 다소 하위 업무였다면 중세 전기, 후기를 거치며 구술의 보조 수단에서 쓰기의 위상이 조금씩 커졌습니다. 생각과 쓰기의 이분화가 통합되기 시작했고 각 계층에서 사무를 보는 쓰기 업무에 대한 질적, 물질적 변화가 생겼습니다. 사무 직장인의 쓰기 업무 비중은 예나 지금이나 시대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사무직원들은 매번 보고서, 기획서 한 장 쓰는데 한국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이 생깁니다. 고대, 중세 작가들은 ‘생각 거리’를 만들어내는 데 골몰했고 필경사들은 손가락 노동이 생계를 책임졌습니다. 앞으로 기술할 인쇄술의 발달 전까지, 쓰기는 역사 속 사무원으로서 갖춰야 필수 요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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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매거진은 출간도서 <사무인간의 모험>을 간추리고 개정해 진행되는 요약 연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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