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인간의 모험
인쇄술의 발전이 사무 인간에게 끼친 영향
힘겹게 인턴직을 마친 이사무는 계약직 사무원이 되었습니다. 새로 들어온 인턴사원에게 이전 자리를 내어 주고 복사기 옆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복사기가 한 대뿐이어서 모든 직원이 함께 사용했습니다. A4용지 채워 넣기도 그의 업무 중 일부가 됐습니다.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는 유인물을 정리해 내부 회의에 참석하는 인원들에게 배부하는 업무도 포함되었죠.
복사 버튼을 한 번 누르면 채워진 A4 용지가 허락하는 한 대량 인쇄가 가능했습니다. 인쇄 도중에 종이가 걸리지만 않으면 말이죠. 실질적으로 중세 시대를 관통하며 대량 인쇄에 대한 실마리가 조금씩 풀렸습니다. 바로 인쇄술의 보급이 있었기 때문이죠.
경제를 떠받드는 수요와 공급 문제는 서적 인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습니다. 읽을거리에 대한 수요는 많아졌는데 제작 여건이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중세에 이어진 기존 필사 복제 방식으로는 많은 필경사를 고용한다 해도 물리적, 시간적인 소모가 컸습니다. 이 시점에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397~1468, 독일)가 개척한 인쇄술 분야는 쓰기 매체와 정보의 절대량을 늘리는 촉발제가 됐습니다.
필사 형식으로는 2개월에서 수년의 제작 기간이 들던 책이 인쇄술의 보급으로 7~10일 만에 4~5백여 권이 인쇄될 수 있었던 것이죠. 1450년부터 반세기 동안 유럽 전역에 8백~9백만 권에 가까운 책이 보급되었습니다. 유럽 전역에 인쇄소가 고르게 분포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적의 보급이 많아진 것은 지식의 사유화 계층이 넓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필사본을 꽉 움켜쥐고 타인의 부러움을 사던 사람들도 줄어들었습니다. 책을 개인이 구입하는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죠. 한편 인쇄술의 발달을 지지한 것은 종교 계층이었습니다. 자신들의 교리를 더 쉽고 더 넓게 퍼뜨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대량 생산 일거리가 늘어난 인쇄업자와 종교계는 상호 보완 관계였습니다.
인쇄술의 등장으로 서적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짐에 따라 1쇄당 책 한 권의 구입 가격은 내려갔습니다. 일단 소비자 입장에서는 그렇습니다. 인쇄업자의 입장에서는 경제적인 인력 구성 자체가 달라졌습니다. 인쇄라는 두 글자 안에는 활자의 주조, 염료 배합, 인쇄 마무리 작업 등 단계적 분업화가 포함돼 있었습니다. 과거 한 명의 필경사가 해내던 업무가 덩치가 커지면서 팀 체제가 공고해졌던 것이죠. 또 팀의 덩치가 커지면서 필요한 인력에 대한 임금 지불이 늘어났습니다. 점차 자본 논리가 작용하게 됐습니다.
인쇄술의 등장에도 여전히 사적인 영역의 쓰기에는 필사가 병행됐습니다. 지금도 손 편지를 쓰듯이 인쇄기술이 모든 영역을 침범하지는 못했습니다. 특히 행정 사무국의 사무원 역할을 하던 필경사들의 고유한 역할도 그대로였습니다. 인쇄업자들 또한 필경사들의 고유 업무를 잠식했지만 여러 증서의 작성, 제작은 사무원 몫이었습니다. 복사기 옆에 하루 종일 붙어 있는 이사무였지만 그의 고유 업무가 따로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15세기, 16세기를 관통하며 늘어난 통치 제제의 관료 기구가 늘어나고 자본주의를 등에 업은 중상주의가 부흥함에 따라 사무 및 공증 문서 작업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이에 필경사들은 인쇄술의 보급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무 일거리를 손에 쥘 수 있었습니다. 개편한 행정 자치부 산하에 일시적으로 계약직 공무원을 늘리던 현대의 세태와 비슷한 모습을 보였던 것이죠.
고대 그리스 필경사의 업무는 많은 노예가 동원되어 이뤄진 하위 행정 사무였습니다. 중세 시대는 통치기구의 사무국에 진출한 필경사들의 지위 상승에 따라 쓰기 업무의 가치가 높아졌습니다. 고대 그리스부터 중세 시대까지 이어진 ‘생각 없이 쓰는’ 작업이 점차 인쇄술의 발달에 따라 ‘생각을 포함한 쓰기’로 바뀌었습니다. 이는 쓰기 작업과 행정 사무의 격이 높아진 것과 같았습니다.
점차 글을 쓸 줄 아는 사람만이 교양인의 면모를 갖췄다는 분위기가 조성됐습니다. 필경사들은 가죽 냄새에 더 이상 역겨움을 토해내지도, 양피지에 칼과 깃털을 쥐고 욱여 쓰지는 않았으나 여러 가지 서체를 다룰 줄 알아야 했습니다. 현대 공무원들이 판에 박힌 서식을 사용하듯 그 당시 필경사들도 점차 문서의 규격화를 준비했고 정해진 공문서식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지금은 서점에 가서 읽고 싶은 책을 고르는 게 독자의 권리이고 관심사지만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까지는 소위 지식인이 내어 놓은 주제의 범위 안에서 읽을거리를 골라야 했습니다. 하지만 점차 늘어난 독자 수에 비례해 텍스트 생산을 하는 작가들의 고민도 더해졌습니다. 지식 충족에 대한 욕구를 다양성 면에서 충족시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서적의 주제가 확장되고 깊어졌습니다.
별자리 해석법, 정원 가꾸기, 요리법, 동물 사육법, 하물며 마녀를 추적하는 법 등 책의 주제는 세분화됐습니다. 책을 만드는 사람이나 행정 사무나 기술론에 가깝던 것이 ‘지식’이라는 욕구와 만나 지식계층의 전유물이 될 씨앗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습니다. 흘러넘치는 가짜 정보 속에서 진짜 정보를 찾아야 하고 지식 처방전을 맞아야 하는 현대인의 입장에서 양질의 정보라는 전제하에 ‘진짜 읽을거리’가 풍부했던 그 시대로 돌아가 봄직도 하겠습니다.
전체적인 관점에서 중세 시대와 궤를 함께 한 인쇄술의 보급과 확장은 서적의 대량 생산에 초점을 맞추지만 사실 행정 사무 시스템을 갖추는데 일조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점차 쓰기가 교양인이 배워야 할 과목으로 인정되는 분위기가 서적의 대량 보급과 맞물려 행정사무 관료 양성의 한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죠.
물론 실질적인 사무 능력을 배양하기 위한 기준이 단순히 쓰기 능력만으로 검증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취업 준비생의 대부분이 비 실무적인 쓰기와 읽기 공부로 점철된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고 있는 현실과도 묘하게 이어지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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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노동의 역사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책 <사무인간의 모험>을 쓴 이종서 작가입니다.
이 매거진은 <사무인간의 모험> 中에서 내용을 일부 발췌해 재구성 했습니다. 현직에서 열심히 구슬땀을 흘리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분들을 응원합니다. 직장생활 고민, 1인기업 문의 등은 댓글로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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