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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글리쌤 Oct 09. 2018

넥타이, 목을 죄는 소속감

조직에 속하는 대신 담보로 잡힌 것들 

넥타이 : 소속감에 취하다 

이사무는 취업의 기쁨을 누리며 정장 한 벌과 넥타이, 구두를 마련했습니다. 밀린 학자금 대출에 빚이 더 늘어나고 있지만 사회가, 회사가 규정하는 기본 매무새를 갖추고 싶었습니다. 며칠 동안은 정장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니 사회 구성원이 됐다는 뿌듯함이 앞섰지만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자유 복장으로 캠퍼스를 누비던 것과는 영 딴판이었죠. 불안한 자유 대신 소속감을 부여받은 소소한 대가라 여겼습니다. 사회에 떨어져 나왔을 때 어딘가에 소속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조합비’ 명목으로 지불해야 하는 것들이 꽤 있습니다. 지불해야 돈을 벌 수 있습니다. 특히 빳빳한 하얀 깃과 넥타이가 주는 갑갑함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사무에게 매우 강렬한 소속감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넥타이의 역사에는 두 가지 설이 유력합니다. 2세기경 로마 제국의 병사가 한 겨울에 양털로 된 천을 목 주위에 두른 ‘포칼’이 넥타이의 기원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또한 기원전 50년경 고대 로마 병사들이 끝이 날카로운 갑옷에 목이 베여 상처가 나자, 긴 천을 목에 휘감았는데 이것을 넥타이의 기원으로 보기도 합니다. 지금의 넥타이와 비슷한 형태로 등장한 시기는 17세기입니다. 30년 전쟁 당시 프랑스 왕권 보호를 위해 파병되었던 크로아티아 병사들이 목에 둘렀던 스카프 형태였죠. 

이를 ‘크라바트’라고 불렀습니다. 무사히 전쟁을 마치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가족과 연인의 바람을 담고 있던 상징적인 물건이었습니다. 크로아티아 병사들이 목에 두른 스카프를 보고, 길을 지나던 루이 14세는 인근 병사에게 물었습니다. 

“목에 둘러진 저것은 무엇인가?” 

어느 나라 병사인지 묻는 것으로 착각해 대답한 것이 ‘크로아뜨(크로아티인)’였고 시간이 흘러 ‘크라바트(cravate)’라는 고유 명칭으로 굳어졌습니다. 이후 루이 14세와 귀족들도 스카프 형태의 천을 목에 두르기 시작했고 군대 복장으로도 범위가 확장됐습니다. 19세기 들어서는 넥타이의 모양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매듭 부분만 남겨진 나비넥타이가 영국에서 등장했던 것이죠. 이때부터 스카프 모양에서 벗어나 띠 형태의 넥타이가 유행했고 현대와 같은 디자인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로마 귀족 의원들은 피 튀기는 전장보다는 법원, 의회, 광장에서 주로 활동했습니다. 창과 검을 들고 싸우지는 않았지만 ‘성대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병사들이 생목을 보호하기 위해  감싸던 스카프를 자신들의 성대를 보호하고자 감쌌고 기능을 가진 패션 도구로 이어졌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목을 감싼 천 조각이 패션을 망가뜨리기도 하고 패션을 완성하기도 했습니다. 스카프와 넥타이의 변화 모습만 봐도 그 당시 역사의 기억과 패션을 눈여겨볼 수 있습니다. 프랑스 왕정도 스카프로 패션과 권위를 나타내고자 했습니다.


크라바트의 모양새를 선호했던 루이 14세에 의해 프랑스 왕실에 스카프가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절 귀족들의 사진을 보면 두터운 스카프를 맨 모습들이 쉽게 눈에 띕니다. 마치 두터운 크라바트를 할수록 더 높은 권위를 나타내기라도 하듯 말이죠. 


더욱 두터워진 크라바트로 인해 목까지 돌리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프랑스 귀족들이 등장하는 영화에서도 흔히 보이는 모습으로 고개를 제대로 돌리지 못하고 몸을 돌려야 하는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이죠. 현대의 넥타이 또한 패션의 의미를 갖지만 노동자 계층과 구분 지을 경계선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의자에 앉아 땀을 흘릴 필요가 없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작은 특권을 나타냈습니다. 반대로 회사에 속하면 규율을 따라야 한다는 규칙과 질서를 상징했습니다. 사무 노동을 한지 몇 시간이 흘러도 미동조차 없는 넥타이는 ‘표준화’, ‘속박’의 의미와 ‘권위’를 앞세운 이중적인 지표였습니다. 


현대의 넥타이는 후천적인 능력과 지위를 과시하는 상징이지만, 과거 프랑스 왕정의 크라바트는 왕정의 절대 권력을 암시하기도 했습니다. 목을 가누기도 힘들 정도로 칭칭 감아 맨 크라바트는 곧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몸’을 의미했습니다. 일거수일투족을 동행하는 시종이 있어 귀족들은 불편함을 감수했고 대신 권위와 패션의 우월성을 선택했습니다. 

귀족정치에 신물이 난 프랑스 시민들이 보기에 크라바트는 허영과 퇴폐의 상징이었고 결국 프랑스혁명 이후로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자취를 감추게 됐습니다.

프랑스혁명과 함께 루이 16세(Louis XVI, 1774~1792, 프랑스) 마리 앙투아네트(Maria Antonia Anna Josepha Joann, 1755~1793, 프랑스)는 처형을 당했습니다. 크라바트 또한 불에 태워졌고 권위의 상징은 수명을 다했습니다. 화려함을 강조한 크라바트는 영국으로 전해져 단순한 디자인으로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엄연히 크라바트와는 다른 심플함을 강조했습니다. 이름도 현대처럼 ‘넥타이로’ 불리게 됐습니다. 프랑스 왕정의 사치품 이미지는 여전히 남아있었지만 외관에서 불필요한 화려함을 덜어냈습니다. 


자본주의 체제는 산업 형태의 표준화, 단순화를 넘어 사회문화 전반에 여러 영향을 끼쳤습니다. 패션과 관련해서도 선택의 범위가 많아짐에 따라 무엇을 입을까 매일 고민하는 것에 지쳐갔고 다른 사람들보다 눈에 띄려는 욕구도 다소 가라앉았습니다. 

이때 영국 국왕 에드워드 8세(Edward Ⅷ, 1894~1972, 영국)의 신사복 차림은 누구에게나 어울리는 조합으로 사람들에게 각광받기 시작했습니다. 개성을 부리지 않고 편하게 선택해 입을 수 있는 옷을 선호하기 시작했고, 남자들은 자신의 개성을 나타낼 수 있는 유일한 패션으로 넥타이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정적인 정장의 색깔 대비 넥타이의 무늬와 색은 다채롭게 변해갔습니다. 현대 남성들도 정장 색깔보다는 어떤 넥타이를 맬까 아침마다 고민을 하고 있죠.

자신의 개성을 나타내던 넥타이가 비즈니스맨의 상징이 된 것은 미국 은행의 면접 방식 영향이 컸습니다. 하얀 얼굴과 금발이 아니면 취업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외모의 비중이 컸고 입사할 경우 같은 정장과 넥타이를 착용해야 했습니다. 비슷한 외모와 똑같은 옷차림은 마치 프랑스 절대왕정 시대의 귀족들과도 같은 분위기를 풍겼습니다. 일사불란하게 같은 차림으로 움직이는 직원들을 보고 있자니 화이트칼라의 전형적인 형상이 탄생했다고 볼 수 있었죠.


비즈니스맨의 전유물이 되어버린 넥타이. 직장인들이 본격적으로 착용하기 전에는 선택으로 결정되던 액세서리였습니다. 하지만 선택을 넘어서 점점 회사의 규칙과 질서가 됐습니다. 규칙과 질서에 편입하고 순응하기 위해 넥타이를 매기 시작했고 소속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았다는 소속감을 느끼면서도, 사무 직장인들이 휴식을 취할 때 가장 먼저 넥타이 매듭을 풀어 버리고 숨을 내쉬는 모습은 무엇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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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매거진은 <사무인간의 모험> 中에서 일부 발췌해 재구성 했습니다. 현직에서 열심히 구슬땀을 흘리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분들을 응원합니다. 책을 통해 소통하기를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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