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 인간의 모험
그들은 왜 쇠사슬에 묶였는가
누군가는 들어가고 싶어 안간힘을 쓰고, 다른 누군가는 떨어져 나오고 싶어 안달인 곳. 들락날락하다 보니 떠나야 할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오는 곳. 어렵사리 발을 들인다 해도 ‘노동력’이 아닌 인생 자체를 빌려 주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받는 곳.
앞서 취업한 선배들에게 한탄과 자조 섞인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이사무는 일단 직장에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3년 동안 차곡차곡 쌓인 학자금 대출을 갚고 밀린 3개월치 월세라도 내려면 어딘가에 소속되어 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는 학생도 아니고 직장인도 아닌 중간계 삶을 하루빨리 접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이사무는 서른 살이 다 되어 ‘사회적 인간’으로 인정받을 첫 관문을 통과했습니다. 인턴직을 따냈습니다. 월급을 통해 물질적 자유를 얻고자 직장에 드디어 입성한 것이죠. 공교롭게도 인턴직으로 입사한 날이 20년 근무를 마치고 퇴직을 하는 김 부장의 환송회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공식적인 환송회가 아니다 보니 친했던 동료 4명만 자리를 함께했습니다.
“막상 떠나려고 명함을 반납하니 직장에서 내 존재는 무엇이었을까 생각이 드네.” 며칠 뒤에 아무런 일이 없던 것처럼 내 빈자리는 누군가로 채워지겠지..”,
“직장은 돈으로 나를 먹여 살린 고마운 존재지만, 퇴직 후 인생 2막을 준비할 여력은 충분치 않았네. 직장생활만 열심히 하면 제2의 인생은 덤으로 보낼 것 같은 희망고문도 있었지. 누굴 탓하겠어”
엉겁결에 환송회에 따라 나온 이사무는 직장 대선배의 말을 곰곰이 듣고 생각에 잠겼습니다. ‘직장인은 정말 희망고문을 당하는 존재일까’, ‘시대만 달라졌지, 고대 그리스 노예의 명맥을 이어온 것이 현대 직장인의 운명인 걸까?’ ‘왜 우리는 그렇게 사무 직장인이 되길 바랐을까?’ ‘어딘가에 소속되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던 것일까?’ 그날 저녁 이사무는 궁금증의 근원을 찾기 위해 노예 제도에 관한 책을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고대 그리스가 노예 제도의 근원지는 아닙니다. 그 이전에도 노예는 존재했습니다. 그럼에도 역사학자들이 고대 그리스 노예제도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노예제를 근간으로 사회경제적인 기반을 마련한 시대이기 때문이죠. 즉 생산도구의 역할을 노예가 맡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전체 노역이 노예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현대처럼 돈을 받는 유급노동과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노동도 존재했으니 말이죠.
노예들의 입지는 그저 ‘필요에 의해 당연히 있어야 할 존재’였습니다.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했을까요?
자유시민들이 하기 싫어하는 하급의 육체노동이 노예들의 몫이 된 것이죠.
누군가의 지위나 권리를 명확하게 내보일 수 없는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지칭하는 단어가 모호합니다. 이름 모를 섬에 끌려가 수십 년 간 강제 노역을 당한 현대판 노예나 고대 그리스 시대 노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누릴 수 있는 권리가 모호할수록 지칭어도 애매합니다.
그들을 가리킬 지칭어가 불명확했습니다. 그나마 철학자 플라톤(Platon, BC 427년 ~ BC 347년, 그리스)이 언급했던 ‘안트 라포 돈’은 고대 그리스 시민들이 노예를 지칭하던 ‘발이 달린 인간’이라는 의미와 일맥상통했습니다. ‘기어 다니는 네 발을 가진 존재’라는 생각을 가졌다는 것을 보더라도 노예를 바라보는 시선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노예는 주인의 사유재산이었습니다. 주인의 집에 거주했고 노동에 대한 보상 없이 생계를 유지하는 데 만족해야 했습니다. 주인이 개별 수당을 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수당 계약서는 없었습니다. 야근 수당이 없는 대부분의 현대 약소 기업처럼 의무사항이 아니었죠. 일을 하면 할수록 나이를 먹음에 따라 자신이 가진 생산 가치는 낮아졌으며 숨을 쉴 수 있는 대가 외에는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노예는 주인이 허락하지 않으면 가족을 꾸릴 수도 없었습니다. 가족을 꾸려도 법적 보호를 받지 못했습니다.
노예를 떠올리면 농사일로 시뻘겋게 얼굴이 타오른 모습, 커다란 돌덩이를 굴리는 이미지가 연상되지만 생각보다 다양한 분야에 동원됐습니다. 4세기 전후로는 아테네에서 스키티아 노예 부대가 활동했습니다. 대상인들이 상업거래 중책을 자기 소유 노예에게 맡기기도 했습니다. 주인들은 현대의 새벽 인력시장처럼 공사현장, 무희, 악사가 필요한 곳에 노예를 파견하고 수당을 챙기기도 했습니다.
다소 놀라운 것은 지금의 사무원 같은 역할을 한 노예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공공분야에 진출한 노예들이 있었던 것이죠. 대부분 사유 재산이던 노예들이 집단적으로 공공기관의 전체 소유가 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먹고 살만큼의 식비를 수당으로 책정받고 간수, 사무원, 화폐 검사원으로 일했습니다.
고대 로마 시기에 접어들며 소유자 입장에서 노예의 반기는 달갑지 않았습니다. 노동자들이 노역 외에 복지에 관심을 두는 수간 이를 억제하는 사측과 갈등을 빚는 형태와 다를 바 없었죠. 막스 갈로의 저서 <스파르타쿠스의 죽음>을 보면 노예 봉기의 의미를 되짚어 볼 수 있습니다. 스파르타쿠스가 이끈 노예 봉기는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권력자들에게 충분히 위협이 가해진 사건이었습니다.
사실 그 위협은 오래가지 않았고 지배계급의 가혹한 탄압과 감시가 격해지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럼에도 모든 시대의 권력 이양 행태가 그렇듯, 한 번의 큰 위협은 진압할지언정 뒤를 잇는 작은 사건들의 잉태는 완벽히 막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하드리아누스(Pablius Aelius Hadrianus, 76년~138년, 그리스) 집권 시기 이후, 로마는 노예 소유주의 절대적 권리를 법제화시켜 노예의 숨통을 열어주기 시작했습니다. 주인이 노예를 죽이거나 검투사 시합 업자와 매매하거나 포주에게 파는 것 등이 엄격히 금지된 것이죠. 이와 함께 해방노예가 늘어나며 국가 요직에 진출하거나 노예 출신 부자가 탄생했습니다.
그럼에도 노예에 대한 ‘법인격’이 강화된 것으로는 보기 어려웠습니다. 선천적 운명을 바꾸는 노예가 있는가 하면 여전히 먼 이국땅으로 끌려가 후천적 노예가 되는 운명을 맞는 것은 일상이었습니다. ‘개천에서 용이 나기 위한’ 마지막 신분 상승의 통로로 여겨지던 사법시험 폐지는 노예시대의 후천적 운명을 막는 목적과 같은 맥락일까요.
로마의 쇠퇴기와 더불어 노예의 신분에 또 다른 변화가 찾아왔을까요? 중세 시대, 도시 해체로 인해 경제적 기반이 무너지며 부자들은 자신의 영토를 지키고자 틀어 박혔고 손에 쥔 것이 없는 자들은 있는 자들의 손에 붙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광활한 지주의 영토에서 생계를 위해 위압적인 조건에도 일을 해야 했던 것이죠. 땅을 가진 자의 입장에서는 사회 분열이 일어나는 현상이 못마땅했습니다. 잃을 게 있었으니까요.
이에 영토를 이탈하려는 자들 앞을 막아섰습니다. 노예를 농노로 변화시키고 발을 묶어 놓은 것입니다. 나아가 종교는 노예의 운명을 받아들이도록 설교했습니다. 고대 시대 노예는 주인집에서 자라며 먹고 마셨습니다. 주인이 생계비용을 부담했죠. 중세 시대 노예는 가족을 꾸리기도 했습니다. 어느 정도 경제적 독립도 인정받았기에 주인 입장에서는 먹여 살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비용의 절감이었죠. 자식도 낳으니 추가 노예 구매 비용도 절약됐습니다.
예전처럼 노동력이 없는 유아, 아동기 내내 먹여 살릴 이유가 없어졌으니 주인 입장에서는 이득이었습니다. 노동력이 발생하는 주기에만 철저하게, 사유 재산답게 농노를 활용했습니다.
권력을 가진 자와 가지지 않은 자의 구도는 수천 년의 시대를 관통해 왔습니다. 지키려는 자와 버티려는 자의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유재산이 되기 싫어 자유를 찾아 탈주하는 농노가 빈번했지만 현대에서는 조직에 속하지 못하면 도태되기 쉽습니다.
“넌 취업 안 하니”라는 이 몇 마디가 조직에 속해야 한다는 현실을 대변합니다. 어떻게든 사회가 설정한 경로대로 어딘가에 소속돼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 하니까요. 그렇다고 안도의 시기가 영원히 지속되지도 않습니다.
마이너스로 경제적 지위로 태어나 기업에서 일하는 동안만 경제적 행위가 가능한 현대 직장인. 노동자에게 있어 생존력을 갖추려면 퇴직 이후에도 살아남을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 시대를 막론하고 최대 과제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유튜브-글리쌤TV 운영중입니다. 1인기업, 직장생활, 글쓰기, 책쓰기로 함께 성장하실 분들은 구독해 주세요
(사무인간의 모험 요약 연재 3화는 다음 주 화요일에 이어집니다.)
<사무인간의 모험> 도서 정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