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중요할까? 이 행성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지도 않았던 작은 천체 하나를 모든 사람이 기억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일까?”
“불필요한 기억은 제거해야지. 공간을 효율적으로 써야 하니까.”
김초엽 <인지공간> (2020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중 김초엽 단편소설)
1. 제나 vs 이브
이 단편소설은 인지공간의 관리자인 ‘나’(제나)가 인지공간 출입을 거부당한 ‘이브’의 세계를 이해하고, 이브의 기억을 인지공간 내부로 들여오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인지공간, 즉 '제나'는 ‘주류’와 ‘비장애’의 세계를 대변한다. 공고하게 다져진 사회적 합의, 규범, 질서의 기반 위에서 ‘구조물’이 견고하게 틀을 잡아나간다. 그 구조물은 우리가 모두 바라보는 것이고, 알아야 하며, 속해야 하는 세계다. 우리는 그 구조물을 수용하면서 ‘비장애의 세계’에서 사람의 권리를 누리며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반면, ‘이브’는‘비주류’, ‘장애’의 세계를 대변한다. 이브는 아주 작은 몸집으로 태어나 더딘 성장을 보이다가 어느 시점부터는 아이들과 현저한 차이가 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브는 결국 인지공간으로의 출입을 거부당한다. 숱한 조롱과 은근한 멸시에도 이브는 그 ‘인지공간’만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기에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선언한다.
반면 제나는 인지공간만이 우리의 전부라고, 우리 지식과 기억의 전부라고 단언한다.
심지어 제나는 ‘어차피 우주에는 못가. 저 밖에는 인지 공간이 없으니까. 우주로 간 우리는…아무 생각도 없는, 동물들보다도 못한 존재일걸’이란 말을 이브 앞에서 한다. 오랜 관습과 통념에 젖어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것은 이브를 모욕하는 말이기도 하다. 상식적인 것이 누군가에게는 폭력이 된다. 이브에게는 애초에 인지공간이 없으므로. 자신들이 규정한 보편세계 바깥에 살도록 내버려진 존재이므로.
제나의 세계는 이브에게 얼마나 심한 억압과 모욕의 말들을 매일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
‘이브’가 인지공간을 옮기거나 변형시킴으로써, 그 세계와 자신의 접점을 찾으려 했을 때에도 친구인 ‘제나’는 얼토당토않고 허황한 생각이라며 짜증스레 대꾸한다. 그리고 친구인 이브에게 점점 거리감을 느끼며, 그와 ‘함께 보내는 시간마저 줄어들었다’고 말한다. ‘오랜 친구를 포기하는 일이 성장의 불가피한 요소라고 생각했다.(233p)’고 말하고 있다. 이브는 이제 인지세계와 자신을 이어주던 가느다란 끈마저 잃어버렸다.
이브의 죽음 이후, 세계는 이브의 존재 자체를 기록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제나는 인지공간의 절대성을 부정하게 되고, 인지공간 바깥으로 나가 그것을 증명하는 첫 번째 사람이 되고자 한다. 체제의 중심에 선 사람이 결국 그 세계를 바꿀 수 있었고, 체제 바깥에 있었던 사람은 희생되었다.
2. 감상 : 여전히 ‘바깥’인 이브의 세계
김초엽 작가의 <인지공간>은 두 세계의 선명한 대비로 우리의 ‘생각’을 구조화하고, 그 구조 안과 밖에 무엇이 있는지 들여다보게 한다. 참신한 시도라고 느꼈지만, 너무나 학문적이고, 두 세계가 극명하게 대비되어 다소 지루한 감도 들었다.
김초엽 작가가 SF(공상과학) 소설로 유명하다는 것, 포항공대 생화학과를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자 왠지 이 소설을 더 이해하게 되었다. 또한 인지공간의 관리자로 이브와 교류하면서도 철저히 무심했던 제나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브의 세계로 간다는 흐름이 잘 와닿지 않았다.
그녀가 ‘이브’를 통해 ‘장애인’을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그것은 해석하는 사람, 보는 사람의 관점에 달린 일이니까. 그러나 이런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세계로 ‘장애인’의 존재를 표현해내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기는 할까? 싶은 생각도 든다.
나를 포함해서, 우리는 얼마나 무심히 살아가는가. 장애인의 고충, 소외, 박탈감에 대해. 눈에 잘 보이지 않으므로, 우리의 집단의식은 그들을 자주 잊어버리곤 한다.
그래서 작가인 그녀가 좀 더 현실적인 세계가 아닌 은유적인 세계, 공상과학적인 세계를 빌려 그들을 불러낸 것만 같다. 그들은 여전히 이곳이 아닌 ‘바깥’에 있는 사람이니까.
김초엽의 <인지공간>은 장애인이 평범한 일상세계에 얼마나 멀리 있는지, 인지공간의 바깥에 존재하는지 느끼게 한다.
또한 ‘이브’는 우리가 부적격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존재나 생각, 의견, 지위에 대해서도 충분히 대입해볼 수 있다. 우리는 때로 스스로가 세상 기준에 부적격이거나 함량 미달이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두려워하는 존재니까. 그래서 세상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 쉼없이 사회화 과정을 학습한다. 나머지가 되지 않기 위해, 그 두려움에 부단히 애 쓰다가 결국에는 허탈해지곤 한다. 고유한 우리 내면의 일부가 이브처럼 사라진 순간들.
이러한 비주류의 상실감과 박탈감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두가지 방법이 있다. 한가지는 제나의 세계의 정점에 서기 위해 내달리는 것, 그리하여 내부를 더 공고히 하며 높은 성을 쌓아가는 것. 주류 속에 있어도, 자신을 비주류라고 내심 생각하거나 비주류로 점쳐질까봐 두려워하는 많은 이들이 있다. (누구나 때로 그렇다) 이때 우리는 주류의 세계를 완벽히 학습하고, 답습한다. 그리고 완전히 주류의 시선으로 비주류를 마주본다. 그들을 타자화하고 교정되거나 더 발전되어야 하는 무언가로 여기는 것이다. 안온한 주류의 삶을 약속받기 위해.
두 번째, 전혀 다른 접근은 바깥이었던 이브의 세계에 경계를 허물고 자주 왕래하는 것이다. 지금 비록 '주류'일지 몰라도 그것이 '정답'은 아니라는 사실을 늘 염두해두는 마음이다. 혹은 '정상'이거나.
그 하나의 시작으로, 이제 '정상인'과 장애인이라는 말은 피해야 한다. '비장애인'과 장애인으로. 장애는 비정상이 아니고, 그저 장애일 뿐이다. 장애가 없는 이는 정상인 것이 아니라, 그저 장애가 없는 것뿐이다. 장애인의 대척점이 ‘정상인’이라는 것은 장애인에게 일종의 모욕이다. 그래서 작은 말일뿐이지만, 잊지 않고 입에 배도록 노력해야 할 것 같다. 그렇게 언어를 통해 우리의 인지공간은 수정되어간다.
어느새 하나밖에 남지 않은 달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기 전에, 이 세계가 더 자주 그들의 이름 부르고 구조를 변화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