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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이현 Jun 04. 2020

첫째의 슬픔과 기쁨

부모에게서 첫 정을 선물받은 첫째들.

첫째는 부모와의 감정이 복잡한 사람들이다.

부모와 첫째 자식 사이에는 좀처럼 여백이 생기질 않는다.

그만큼 가깝고, 갑갑하다.      


부모는 무지한 상태에서 첫째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위해 애쓴다.

부모는 때로 첫째가 자신의 일부이고, 분신이고, 때로는 자기 자신 같다.      


첫째는 커가면서 깨닫는다. 애초에 순수하고 무지한 얼굴로 존재해있던 애정이 점차 덫이란 구조물로 견고하게 가공되고 있음을. 그리고 자신이 그 구조물 위에 걸린 줄 하나를 위태롭게 밟고 있음을. 휘청거리는 줄에서 떨어질때마다 그들은 서로에게서 멀어진다. 그들은 그렇게 멀리 떨어질 수 없는 사람들이다. 멀리 있어도 뼛속까지 닿을 정도로 가깝게, 서로를 응시한다.     


첫째는 부모의 온전한 사랑을 그 줄의 끝에서 획득하기를 갈구하며 다시 줄 위로 오른다. 첫째에게 그것은 사람이 되기 위한 관문과도 같다.      


부모는 유독 첫째에게 ‘자기동일시’의 거울을 비춘다. 그 거울은 좀처럼 깨지지도 않고 멀어지지도 않는다. 첫째는 부모를 통해 자신을 보고, 부모도 첫째를 통해 자신을 본다.      


그 빛의 고리를 느슨하게 하려할수록 감정의 파도가 요동친다. 짓누르는 믿음들, 기준에 부합하지 못할 것 같다는 자각, 실망시켰다는 자책감, 나와 타인에 대한 환멸. 그것은 다시 아무런 감정도 없는 곳에서 쉬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한다. 진공 상태처럼 그 어떤 압박감도 없는 상태, 가벼움에 대한 상상, 자유로움에 대한 갈망.      


첫째는 그런 운명을 타고난다.

끈을 놓쳐버릴 것만 같은, 또는 끈을 끊어버리고 싶은 두 자각 사이에서 맴도는 시간.

그것은 그만큼 그들이 가깝고, 역사가 길기 때문이다. 서로를 객관화하여 들여다보기 어렵다. 서로가 이미 풀어버릴 수 없을 정도로 엉겨붙은 역사로 살았기 때문에.     


첫째와 부모는 평생 서로간의 적절한 거리두기의 방법을 배워가는지 모른다.

그 배움에 완성이란 게 있을까?      


다른 형제가 이미 자신만의 자유로운 나라를 찾아, 힘껏 날개짓 하고 있을 때에도 첫째는 머저리처럼 날아가도 되는지, 날개에 흠은 없는지 들여다보며 미적거린다.

머뭇거리고 뒤돌아본다.      


결국, 마음에 남기 때문이다.

세상 그 무엇보다 빛났던 부모의 사랑이.

누구나 애초에 가지고 있을 그 그리움의 시초가.      


첫째의 에너지는 대부분 그 생명이 태어난 영토에 머무른다.

그 관성을 깨고 날개를 펴 멀리 날아갔더라도, 많은 것들이 그 시초가 묻힌 영토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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