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꿀
“그러니까 A 씨는 부모님으로부터 B와 관련한 아픈 경험, 고생한 기억을 물려받았네요. 그럼으로써 B에 대한 인식을 재조정하고, 다른 시각으로 볼 기회를 얻게 되었네요.” “그렇죠.” “역시…. 우리는 부모님으로부터 언제나, 무언가를 배우게 되기 마련인 것 같아요.”
경제 시사 분야의 어느 유명 유튜버는 단독으로 나온 게스트의 이야기를 한참 듣더니, 그렇게 말했다. 투자와 재테크에 성공해 자신의 이름을 홍보하던 게스트는 자신의 성공담 밑바닥에 깔린 숱한 실패담을 찬찬히 풀어내던 중이었다. 부모님의 실패 사례를 곁에서 지켜보며, 그 영향 아래 저지른 자신의 선택과 과오를 되짚어내고 있었다.
자신의 실수 중 어떤 부분은 부모님의 실패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당시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며, 되돌아보니 그때 자신이 잘못 판단했던 것 같다고 말하던 중이었다. 그때 유튜버는 게스트에게 공감하면서도, 부모님의 실패를 하나의 ‘경험자산’으로 재해석하고 있었다.
나는 순간, 설거지를 멈추고 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가 무척이나 현명하고 단단한 어른으로 보였다. 저런 겸손함은 안정된 자존감, 단단한 내면에서 나오는 거겠지. 부모가 가진, 한 인간으로서의 부족함도 하나의 온전한 유산으로 받아들이는 자식의 성숙한 모습이라니. 나는 그 말이 그가 삶을 대하는 태도, 자세, 인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그에 비해 나의 격은 여전히 여물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나의 생채기에 상처를 덧내며 덧없는 변주곡에 마침표를 찍지 못한 듯하다. 부모도 한 인간이라는 것을, 세대가 이어지며 조금씩 나아지고 있음을, 그 시간의 덕을 내가 누리고 있다는 것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다.
인식이 곧 현실이라는 말은 정말 무섭다. 나의 인식은 변화가 절실했다. 부모가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못했더라도 그것은 이제 그들의 삶이고, 나의 자리가 아닌 것이다. 조금씩 부모와 나의 거리를 확보하며 그들을 나와 다른 타인, 가장 가까우면서 가장 요원한 존재로 인식해가고 있다.
일본의 한 석학인 오마에 겐이치는 인간을 바꾸는 세 가지 방법으로 공간, 만나는 사람, 시간을 바꿀 것을 들었다. 나는 2년 전 오랫동안 살던 터전에서 멀리 벗어났다. 현실적 이유 외에도 내적으로 강렬한 동요가 일었기 때문이다. 내게 디폴트값으로 주어진 어떤 관습, 부모에게 물려받은 삶의 문법을 일정 거리에서 되짚어보고, 재조정하고 싶었다. 여전히 그 길 위에 서 있다.
“시는 당신을 아프게 하려고 온다. / 평생 치유되지 않을 / 상처를 영혼에 심어주려고 온다 / 먼동도 시의 목적은 아니다 / 시는 범람하는 흙탕물, 지렁이의 / 격렬한 꿈틀거림, 춤추는 /들판의 근육이다 / 시는 당신을 아프게 하려고 오지만 / 당신이 아파야 시가 아프고 / 벌은 보이지 않는 꿀을 따서 모은다 ”
- 황규관 <나쁜 시> 중에서
나의 어떤 성향이 아픔을 더 오래 기억하기 때문인지, 그 아픔이 응당 오래 기억할만한 것이어서 잊히지 않는 것인지, 둘 중 어떤 것이 정답인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아프다면, 그 아픔이 헛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 그 아픔이 내게 말하는 바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