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죽음 하나
민음사TV를 보고 있는데, 정기현 편집자가 말했다. "친구가 그러는데, 울고 싶을 때 '울지마 바보야'(노래)를 생각하면 울음이 그친대." 공감이 가서 따라 웃다가 문득 내 가장 친한 친구, 죽어버린 그 녀석의 말 중에 내가 기억하는 말은 무엇인가 떠올려보았다.
없었다. 우리가 주고받은 말들이 워낙 시시껄렁했던 탓인지, 벌써 7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버려 다 잊힌 건지. 도무지 생각나는 말이 없어 화가 나려 했다. 그러다 갑자기 한 마디가 떠올랐다. 우리의 마지막 만남에서 들었던 말. "암 보험 있어? 없으면 꼭 들어. 진단비 많이 주는 걸로." 내게는 친구의 유언처럼 남아 있는 말이었다.
날 버리고 죽어버린 데 대한 미움 탓인지, 일 때문에 바쁘다는 핑계로 아픈 친구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죄책감인지. 어느덧 휘발되어 버린 추억의 끝자락을 붙들고 너를 생각하며 조금 울었다. 11월 15일, 그녀의 7주기를 앞두고.
2. 죽음 둘
내 유일한 친구가 죽어버리기 얼마 전. 떠나보내야 했던 사람이 또 있었다. 자주 만나는 사이는 아니지만, 내적 친밀감이 두터웠던, 내가 아주 좋아했던 언니였다. 그녀는 아주 갑자기 떠났다. 부고를 전하던 사람에게 쌍욕부터 쏟아낼 만큼 예상치 못했던 죽음이었다.
그리고 몇 년 후, 언니의 절친이었던 한 유명 코미디언이 생을 마감했다. 그녀가 힘들어한다는 얘기는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욕심을 냈다. 지금쯤이면 괜찮아지지 않았을까, 지레짐작하고는 여러 통로로 출연 섭외 의사를 전했다. 그녀는 무척 정중히 거절했다. 아깝다고만 생각했다. 그때의 난, 몇 개월 후 그녀가 그렇게 세상을 떠나버릴 줄 몰랐으니까.
3. 다시, 11월
그렇게 11월이 되면 온라인에 그 희극인을 추모하는 게시물이 뜨고, 그 속에는 항상 나란히 웃고 있는 언니가 있다. 나는 그 둘을 보며 '이제는 부디 행복하셔라' 하고 빌다가, 이제는 나란히 웃을 수 없는 내 친구를 떠올린다. 고작 몇 년 사이에 습관이 된 듯한 나만의 추모 루틴이랄까.
그러다 최근 추억에 약간의 교집합이 있는 한 지인이 그 루틴에 불쑥 끼어들었다. 희극인을 추모하는 글에 언급된 과거의 단편. 추억에는 저작권이 없고, 추모에 자격이 필요치 않을 테지만 짜증이 솟구쳤다. 나는 왜 화가 난 걸까. 어떤 부분에 발작 버튼이 눌린 걸까. 원인을 짚어보자니 너무 치졸해서, 그냥 눈감아 버리기로 한다. 11월은 나에게 아주 거지 같은 달이니까 어쩌겠어하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