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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씨아무개 Mar 18. 2016

'신'은 있다

왜냐하면 없다고 말하는 당신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신'을 부정하는 것은 '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보지 못한 것을 확신하게 하는 마음, 즉 창의력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그것을 마침내 알아차리게 되는 마음'이며, 이는 인간의 인지력이 아닌 초인간적인 작용에 의해 우리의 마음속에 아무 이유나 대가 없이 생기는 '선물'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창의력과 같은 느낌들을 각각의 공식으로 나타낼 수 없다는 것에 그 근거가 있다.


세상에 새로 생겨난 것은 없다. 원래 있거나 앞으로 때가 오면 드러나게 될 것들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셨고, 우리 인간과 세상은 그분의 작품들을 하나씩 발견해가고 있는 것이다. 아직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였을 뿐 우리의 상상 속에 있는 것과 그것의 존재를 부정하는 마음 조차도 이미 그것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 의문인 것이다.



한동안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인 분이시라는 개념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나'라는 '인간'의 속성을 들여다보니 그동안 머리로만 알던 것을 드디어 마음으로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하는 것이 모두 하나님께서 그러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본떠 우리를 창조하셨기에, 우리가 사물을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도 보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며,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도 들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아픔에 슬퍼하시고 기쁨에 기뻐하시는 분이시다. 나는 이것을 글이 아닌 마음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이 그저 소문이 나고 비밀이 새어 나가기 때문에 생긴 말은 아닐 것이다. 신의 복음이 전해지기 몇 백 년 전에도 누군가는 우리를 지켜본다고 생각했기에 선조들이 도덕과 양심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이고 그것은 곧, 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마음에서 오는 것이었다. 옛 선비들이 윤리와 도덕적 양심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것이 허망한 것이었다면, 진리를 위해 맹렬히 싸우고 져버린 온 세상의 위인들은 모두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신발에 짓밟혀 죽어버린 개미의 죽음만도 못한 것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사람은 있어도 이순신이나 논개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사람은 없듯이, 진리는 분명히 존재하고 그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 신의 복음을 접하기도 전에 지레 신을 부정하게 되는 마음, 이 모든 것이 바로 신이 존재하기 때문인 것이다.



당신은 신을 부정하는가? 그렇다면 어째서 없는 신을 그토록 부정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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