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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왈 Jul 02. 2019

시간의 끝이 있기는 하는 걸까

항저우에 위치한 서점인 단향공간에서 중국 10개 도시의 서점들이 협력 주최한 인디영화제에 참석했다. 오늘 본 영화는 두 편. 벨기에 감독은 어머니인 94세 노인을 담고, 중국의 30대 젊은 감독은 대학시절 중국 양로원의 노인들의 생활을 조명했다. 영화는 죽음과 삶을 이야기한다.  


주저리주저리 


벨기에 흑백 필름은 노인의 얼굴, 손에 가득한 주름의 질감을 매우 극대화한다. 마치 운남 산 위의 차곡차곡 명확히 분리되어 쌓여있는 차밭들을 떠올리게 하는 선명한 선들, 주름들은 나의 40년, 50년, 60년 뒤를 상상, 아니 예상하게 했다. 


나이 드는 것을 별로 느끼지도, 원망하지도 않는다. 외국에서는 내 나이를 알려 줄 기회가 많지 않아 내가 몇 살인지 잊어버리기도 한다. 연령대마다 해야 할 일에 사회의 긴박한 경고는 이미 상관 없어진 지 오래다. 매일 아침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나를 볼 때마다 변화를 발견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오늘 이 영화를 보며, 주인공의 주름들을 마주하며 이후 이러한 나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싶었다. 그때가 되어서도 내 몸의 변화에 무감각할 수도 있다. 아직은 모른다. 


90대 노인은 유쾌하다. 침대에 계속 누워 있지만 그를 방문한 아들과 농담을 하기도 하고, 아들의 기타 반주에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와인 한 잔을 음미하기도 하고, 담배를 입에 문다. 그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말로 몸으로 얘기한다. 때로는 정신이 혼미해져 죽음의 환영이 자기에게 찾아왔다가 아들에게 털어놓는다. 그러나 그는 살고 있다.  


요즘 <장자>를 다시 읽고 있다. 장자는 삶과 죽음의 이분법적인 사고를 탈출한다. 그의 비유들이 가득한 애매모호한 이야기들은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음을 드러낸다. 죽음과 삶, 아름다움과 추함, 그리고 명예, 부, 지식 등에 연연하지 않는 삶을 그는 지향한다. 그 어느 것도 쓸모가 있을 수 있고, 쓸모가 없기에 쓸모 있을 수 있다는 재미있는 관점으로 자신과 세계를 마주하며, 신바람 나는, 자유롭게 떠도는 삶을 구현한다. 


주저리주저리


아마도 초월적 존재가 있을 것 같다. 그게 사람의 형상이건, 신이건, 추상이건. 그가 내게 오늘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었을 것 같다.  


왠지 죽음 뒤에 삶이 있을 것 같다. 아직 우리는 죽어보지 않았기에 죽음에 대한 불안이 다가오지 않은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일 수도 있다. 죽음 뒤에 또 다른 삶의 세계가 있을 수도 있고, 환생해 또 다른 삶을 살아갈 수도 있다. 삶-죽음-삶… 을 반복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살고 있다. 영화의 94세의 노인의 시간을 아직 경험하지 않았기에 지금 새파란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변한다. 10년 뒤 나는 또 다른 말을 할 수도 있다. 같은 헛소리를 지껄일 수도 있다. 


영화를 보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아쉬움이 앞섰다. 할머니가 생각이 났다. 우리 할머니도 90세였는데. 내가 중학생일 때, 할머니는 치매를 앓고 있었다. 계속 혼자 살기를 고집했던 그였지만 병이 심각해져 우리 집에 와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엄마, 아빠, 나와 동생은 각자의 일들로 바빠 집에 없는 시간이 많았다. 할머니 혼자서 텅 빈 집을 감당하기엔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종종 넘어졌다. 어느 날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화장실에 할머니가 쓰러져 있었다. 할머니의 몸은 멍투성이였다. 머리에서 피가 났다. 그 사건 이후 할머니는 고모네 집, 또 다른 고모네 집을 전전했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어 기숙사에 살기 시작할 때쯤 할머니는 요양원에 살기 시작했다. 점차 할머니의 얼굴을 보는 기회는 줄어들었다. 수능 보기 며칠 전, 나는 공부를 핑계로 그동안 미뤄왔던 병원 방문을 했다. 그때가 할머니를 본 마지막 순간이었다. 


나는 왜 그때 할머니랑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까, 영화 속 노인과 아들처럼 농담도 하고 노래도 듣고 같이 밥도 먹을 수 있었는데 말이다. 그때 할머니는 나와는 다른 사람, 세대, 그저 노인일 뿐이었다. 


지금의 나는 나이를 나이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는 그냥 다른 시간을 가진 사람들인 것뿐, 같이 이야기할 수도 있고, 밥도 먹고, 영화도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냥 할머니를 그렇게 떠나보낸, 그를 고독하게 했던 한 사람으로 아쉽다. 이러한 아쉬움을 ‘산 자인’ 우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포장하는 것일 수도 있다. 죽은 자에 대한 그리움은 두려움, 공포로 나아간다. 


주저리주저리




Twilight of a Life (Sylvain Biegeleisen, 2015).  이미지 출처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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