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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 Mar 14. 2019

뭐가 있었는데.

미세먼지가 지독한 3월이었다. 언제나처럼 운동을 하고 집으로 가는 마을버스에 올라탄다. 10분정도 달려 집에 들어와 맥주 한 캔을 까먹으며 오늘 하루 세상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훑어본다. 나의 일상.


언제든 떠날 거 같은 마음으로 임시거처라 생각하고 왔던 동네에서 산 지도 벌써 3년째. 제법 익숙해졌다. 어엿한 동네주민으로 미용실은 어딜 가야할지, 마트는 어디가 싼지, 아플 땐 어느 병원에 가고 어느 약국에 가야할 지 정도는 꿰고 있다.


다이어리에 일기를 쓰다보니 브런치에 글을 쓰지 않은 지 오래다. 맛있는 걸 많이 먹으러 다니고, 남자친구랑 좋은 데 놀러도 많이 다닌다. 회사에선 후배가 잔뜩 생겨 점심을 얻어먹는 일보다 사주는 일이 많다. 지독한 기관지염과 감기를 앓고 운동을 시작했고, 날이 따뜻한 날엔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퇴근한다. 외국어를 배우고 싶어서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덜컥 HSK시험 접수를 했는데, 준비가 하나도 안되어 걱정이다. 시험 응시료가 꽤 비싸다.


저녁을 같이 먹던 동료가 요즘 예전처럼 의욕도 생기지 않고 재미도 없다고 말한다. 난 원래 일에 큰 의욕은 없었다고 답하면서, 하루 웬종일을 보내는 회사라는 세상에서 내 생활과 기분 그리고 리듬이 매몰되지 않고 사는 법에 대해 고민했다. 회사에서의 나와 여섯시 이후의 나를 완전히 분리하기는 아무래도 불가능하니까.


오늘 참석한 사내 간담회에서 17년을 근무한 선배가 말했다. 요즘 들어오는 직원들은 이 회사에서 대단한 뭔가를 이루려고 들어오는 게 아니라, 다들 여섯시 이후의 자기 삶을 지키고 싶어하며 주어진 일만을 하는데, 그 사이에서 의욕을 가지고 일하려는 사람들조차 의욕이 꺾이게 되는 시스템적인 문제가 있다고. 다들 한시간가량 간담회 토론을 하면서도 어떤 해법도 내놓지 못했다.


일과 삶. 워라밸. 단순히 여섯시에 퇴근할 수 있다고 해서 간단히 이뤄질 수 있는 개념은 아닌 거같다. 일은 주어진 시간 내 주어진 업무를 해낸다고 치더라도 삶에는 매뉴얼도 없고 감사도 없고 실적도 없고 결재해 줄 부서장도 없으니까. 회사 밖의 내 삶에게 더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난 2호선을 타고 출퇴근을 하는데, 그 지옥철에 끼어 탈 때마다 꼭 이게 직장인의 삶 같다는 생각을 한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숨만 겨우 쉬면서 서로 얼굴 찌푸리며 가면서도 이렇게 괴로운 게 나 혼자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안심하고, 그걸 꾹 견디면 잠시 문이 열리며 숨통이 트이고. 한달 내리 죽네사네 하며 회사와 집을 오가다가도 한달에 한번 꽂히는 월급의 달콤함 때문에 그 쳇바퀴에서 다들 쉽사리 내려오지 못하니까.


내가 해야할 일, 벌어야 할 돈 말고 또 뭐가 있었는데. 노랫말이 오늘 종일 귓가에 맴돌았다. 뭐가 있었는데, 정말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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