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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 Jan 28. 2018

Antifreeze


1. 날씨

요즘 날씨가 정말 춥다. 선사시대였다면 인간이라는 종이 멸종하지 않았을까 싶을정도로 춥다. 베란다의 수도관은 꽁꽁 얼어버린지 오래고, 난 베란다에서 뭔가 할 생각을 집어치운지 오래다. 심지어 며칠전엔 화장실 변기 물탱크가 얼어버렸다. 머리를 조금 덜말린 채 밖에 나가면, 문을 열자마자 머리카락이 얼어서 바삭바삭(?) 해진다. 내년 겨울도 이렇게 추우면 어떡하지? 얼른 봄이 왔으면 좋겠다. 아주아주 오래 전부터 겨울이었던 느낌인데 왜 겨울이 끝나지 않을까. '니가 건네주는 커피 위에 살얼음이 떠도 우리 둘은 얼어붙지 않을거야 바다속의 모래까지 녹일거야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거야.' 이겨울이 끝날 때까지 얼어붙지 않고 살아남아야지.


2.사회생활은 처음이라

지난주 금요일. 회사를 안갔다. 미리 휴가를 낸 게 아니라, 그냥 가기싫어서, 도저히 가고 싶지 않아서 회사를 안갔다. 전날 회식의 여파도 있었고, 최근 사무실의 뒤숭숭한 분위기 탓도 있었다. 하루도 더 다니고싶지 않은 기분이었고, 아파서 못가겠다고 말만 하고 회사에 가지 않고 하루를 보냈다. 둘째가라면 서러운 모범생출신이라 학창시절에도 이유없이 지각이나 결석을 해본적이 없었다. 거짓말을 하고 학원이나 학교를 빠지는 일은, 아마 내가 기억하는 한에선 없었다. 그 때문인지 거짓말을 하고 회사에 안가고 있으니 뭔가 큰 잘못을 한 느낌이고 불안하기도 했지만 회사에 안가도 하루는 부지런히 흘렀고, 내일 또다시 출근해야한다는 잔인한 현실은 아무것도 바뀐 게 없다.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폭탄선언을 한 나에게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아빠는 그렇게 적성에 맞지 않는 회사를 28년이나 다녔어. 그렇구나, 아빠는 내 나이만큼의 시간동안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해왔구나.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28년이 되기 전에 빨리 그만둬야지, 하루라도 어릴 때.


3.안경

눈이 정말 많이 나빠졌다. 라섹수술을 한지 8년정도 됐으니 나빠질 법도 한데, 이정도로 잘 안보인다는 느낌은 낯설다. 매일 컴퓨터를 보고, 그외의 시간엔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나빠지지 않을 리가 없다. 재수술을 생각하긴 이른 것 같고, 일을 할때나 영화를 볼때는 안경을 쓰게 됐다. 안경이 무겁고 불편해서 그외의 시간엔 그냥 안보이는 대로 살고있다. 낮엔 그러려니 하는데, 밤에는 특유의 빛번짐이 더해져 거리 전체가 흐릿하게 '퉁쳐져' 보이는 기분이다. 그럴때면 아이유의 '안경'이란 노래를 떠올린다. '그렇다해도 안경을 쓰지는 않으려구요 하루 온종일 눈을 뜨면 당장 보이는 것만 보고 살기도 바쁜데 나는 지금도 충분히 피곤해 까만 속마음까지 보고 싶지 않아/ 그렇다해도 안경을 쓰지는 않으려구요 속고 속이고 그러다 또 믿고 상상을 하고 실망하기도 바쁜데 나는 지금도 충분히 피곤해 누구의 흠까지 궁금하지 않아 나는 지금도 충분히 피곤해 좀 더 멀리까지 보고 싶지 않아'


4.한계

가끔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어쩌지 못하는 한계들을 실감한다. 수많은 한계들 중 요즘 가장 크게 체감하는 건 아무래도 내 성별에 대한 한계다. 점심시간이면 50대들이 말을한다. 요즘 여자들이 너무 많이 들어와서 큰일이야, 남녀 따로 뽑아야 돼, 여성상위시대야. 앞에선 아무래도 그렇죠, 하고 웃으면서 늘 뒷맛이 씁쓸하다. 왜 여자들이 많이 들어올 수밖에 없는지는 궁금하지도 않겠지. 왜 남자들이 적게 뽑히는지는 직시하고 싶지도 않겠지. 인사철이 되면 말한다. 우리팀엔 입사동기 여섯명 중 한명인 남자동기가 승진 일순위가 될거라고. 그 동기는 우리 중 성적이 가장 나쁘고, 심지어 우리 팀에 들어온 것도 모종의 빽을 이용했더랬다. 사실 그런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더라. 성적, 능력, 성실함 모든걸 압도할 수 있는 게 따로 있었다는 걸 여태 모르고 살았다. 사회생활은 처음이라. 그런걸 노골적으로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고.  


5.행복

나는 나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드는 덴 자신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치만 요즘은 잘 모르겠다. 뭘할때 행복한지도 희미해졌고, 순간 행복했다가도 또다시 내일도 그다음날도 출근해야한다는 사실은 날 갑갑하게 한다. 사실 이대로, 마치 패터슨처럼 살면 어영부영 나이들어 갈 수도 있을 것 같다. 매일 똑같은 시간 출근을 하고 주어진 일을 하고 퇴근을 하고, 남은 시간엔 시를 쓰고 강아지를 산책시키고 바에 들러 차가운 생맥주 한잔을 마시는 패터슨처럼. 일상을 예술처럼. 내가 원하는 건 뭔가 다른 무언가인 것 같은데 그걸 정말 모르겠다.


요즘 스트레스 받을 때면 열심히 집청소를 한다. 오늘도 청소기를 돌리고 방을 닦으며, 집이 좀 더 넓어서 본격적으로 청소를 하고싶다는 생각을 했다. 회사에서 받은 휴대용 공기청정기를 돌리고 있는데, 이게 과연 효과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어젠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환상의 빛>을 보다가 미처 다 보지 못하고 잠들었다. 그 영화를 마저 보고 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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