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전부, 사랑이어라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타인의 온기에 저릿해질 수 있는 가슴을 가지고 태어났다.
한 수녀(修女)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자신이 빌었던 첫 번 째 소원은 '수녀가 되는 것'이었다고 하니, 그의 수녀의 꿈은 퍽 깊고 오랜 것이었으리라. 성인이 된 그는 자신의 오랜 꿈을 좇아 수녀가 되기로 결심했고, 수녀원에 들어가기 전 큰아버지 댁을 방문했다고 한다. 그의 큰아버지 댁이 어디인지 내가 정확히 알 길은 없으나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다녀가고자 해도 저만치서 뛰어오는 개들이 먼저 소문을 내는 곳'이라는 말로 미루어 보아 적어도 그와 내가 머물고 있는 이 북적이는 도시는 아닐 터였다. 그런 곳에서 땅을 일구며 당신들의 건실한 삶으로 신에게 바치는 기도를 대신하던 큰아버지 내외 분에게, 신을 섬기는 수녀가 되겠다는 조카딸의 결심은 쉬이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다만 그의 결정을 지지해 줄 수밖에 없음을 알기에 그날 밤 가족은 아쉬움에 긴긴 대화를 나누었고, 수녀는 건넌방으로 가 잠에 들었다고 한다.
다음 날 아침, 아니 새벽, 여명만으로는 마주 앉은 이의 얼굴을 알아볼 수도 없을 무렵에 수녀는 "밥 먹어라."라는 말에 잠이 깼다. 부스스 일어나 눈을 떠 보니 자신의 앞에는 큰아버지 내외의 삶만큼이나 투박하지만 정갈한 음식들이 한가득 담긴 소반이 놓여 있었다. 오직 자신만을 위해 차려진 그 밥상 앞에서 수녀는 목이 메어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야기를 마치며 "'밥상'을 받아보신 적이 있나요?"라던 그의 격양된 물음에서 나는 그 날 수녀가 느꼈을 감정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자고 있는 조카를 위해 새벽부터 밥을 지어 밥상을 가져오셨던 큰어머니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 조카의 밥 먹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시던 큰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사랑 이외에는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내가 이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한 영문 칼럼을 읽으면서이다. 정확히는 한 영국 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요리 매거진의 글이었다. 'Breakfast in bed recipes'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나는 'breakfast in bed'라는 개념을 처음 접했다. 그러나 왠지 떠올릴 수 있지 않은가. 침대 위에서 맞는 아침 식사가 어떤 느낌일지는. 모두가 아직 잠들었을 무렵, 누군가를 위해 정성이 담긴 요리를 하고 그를 위해 침대까지 '밥상'을 내어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지는. 'Serve breakfast in bed to show your care!'라는 칼럼 속의 글은 굳이 필요 없었을지도 모른다. 설령 breakfast in bed가 무엇인지 처음 접해본 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태생적으로 나를 위해 침대로 아침 식사를 배달해주는 이의 온기에 저릿해질 수 있는 가슴을 타고났으니까.
이 칼럼을 읽는 동안 한동안 잊고 지냈던 수녀의 이야기가 겹쳐지며 나는 잠시 먹먹해지는 기분이었다. 지구 반대편, 어쩌면 서로 결코 닿을 일이 없는 곳이라 할지라도 결국 어디나, 사랑의 모습은 다 같구나. 조카를 위해 잠자리로 밥상을 내어오는 큰어머니와, 연인을 위해 breakfast in bed를 준비하는 이의 모습은 결국 같은 것이 아닌가. 누군가가 가르쳤을 리도 만무하지만 온전한 사랑의 모습은 결국 어느 지점에서건 마주하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전부, 사랑이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