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진솔 Apr 26. 2022

 우울증 일기 63. 통증


우울증에는 통증도 있다. 아니 통증이라는 건 감각기관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하지만 우울증에도 통증이 수반된다. 우리의 뇌는 심리적으로 고통을 느끼면 신체적인 고통과 유사하게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마음이 쿵쿵 찧듯이 아프다가 진짜 뭔가가 쿵쿵 내려 찧듯이 아픈 것과 같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지 멀쩡하고 어디 피흘리는 곳도 안보이니 저사람이 통증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수밖에. 


나는 상담을 하면서 나의 통증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늘어놓다가 그것을 가만히 듣고 있는 의사선생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런 질문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이라고 실례를 무릎쓰고 운을 뗐다. 


"의사선생님은 제가 얼마나 아픈지 어떻게 아세요? 겪어보지 않으셨잖아요."


라고 물었다. 어디서 그런 당돌함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울증의 고통은 굉장히 주관적인데 이 사람이 어떻게 이해를 할 수 있을까 정말 순수한 의문이어서였다. 의사선생님은 "환자분들이 말하는 것을 통해서 어느정도 이해하는 것". 이라고 말씀하셨다. 덧붙여 "그럼 모든 병은 의사가 걸려봐야 아는 건 아니"지 않나랴는 말도 하셨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상냥하고 공감을 잘하시는 의사 선생님을 만나더라도 저 분은 우울증을 겪어보셨을까? 겪어보지 않고서 내 고통의 크기는 얼마나 느낄 수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었다. 


[보이는 어둠]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이 병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대체로 동정심과 공감대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건강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경험에 기초해서는 그 이해할 수 없는 형태의 고통을 근본적으로 상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라고. 아, 나는 저자의 말을 듣고 정상인들이 결코 나를 이해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본디 정상적인'우울감'을 느끼는 그들에겐 '우울증'이 가져오는 감정의 크기와 고통의 정도에 대해서 상상조차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저자는 이어서 말한다. '나에게 그 고통은 익사 혹은 질식할 떄의 느낌과 거의 맞닿아 있었다. 하지만 심지어 그런 이미지 마저도 그 고통을 정확하게 포착했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는 적확한 묘사를 하기를 포기했다고 말한다. 


질식할 떄의 느낌....도 맞긴한데 나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고통은 '갈갈이 찢기는 느낌' '믹서기에 돌아가는 느낌' '송곳으로 찌르는 느낌' 이런 정도로 묘사할 수 있겠다. 먹먹함도 느끼고 피부가 짓무르는 느낌의 고통도 함꼐 온다. 물론 난 피부가 짓물러 본적도 없고 믹서기에 들어간 적도 없다. 그냥 그런 언어가 적절할 것 같아보였다. 


뭐 나의 표현은 꽤나 과장된 표현인 것 같으니, 보통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이미지 하나 가져와보겠다.   


 


통증이 몰려올 때면 맨날 떠오르는 이미지다. 이 드라마를 챙겨본 것은 아니다. 우연히 이 장면을 보게 됐는데 앞뒤 맥락을 모르는 상태여서도 눈물이 났다. <꽃보다 아름다워> 라는 드라마에서 고두심이 '가슴이 아프다'면서 빨간약(요오드용액)을 가슴에 바르는 장면이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치료를 하기 위해 약을 찾다가 집 한 켠에 있는 빨간약을 바르는 것이다. 엉엉 울기보다, 이렇게 묵묵하게 약을 바르는 모습이 더 애처로워보였다. 


오늘도 나는 매끄럽고 정확하게 고통을 전달할 수 있는 언어를 찾아내고자 한다. 아프다고 말해봤자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지는 꽤 오래됐다. 울음도, 비명도 반복이 되면 타인에게는 짜증이 된다는 것도 잘 알았다. 우울의 감정을 세세히 기록하는건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는 글은 본 적이 있는데도 난 그렇게 한다. 


정말 잘 담아내서, 아프지 않은 사람들을 이해시켜보려고. 


멀쩡해보이지만 그 고통의 크기는 심각하다는 걸. 

작가의 이전글 우울증 일기 62. 당연한 것은 없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