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솔 Sep 21. 2022

우울증 일기 81. 다짐

27살때였다. 첫 회사에 들어갔다. 사수는 친절하지 않았다. 소위 꼽을 준다고 해야하나? 그런 일들이 잦았다. 하루는 이랬다. 그 분은 나와 같은 대학교를 나왔는데 내가 졸업하는데까지 오래 걸린 것을 알고서는 뭐했느냐고 했다. 사실 나는 우울증때문에 힘들어하면서 겨우겨우 학교를 다녔던 터라 성적도 엉망이었고다 다녔던 기간도 길었다. 하지만 우울증때문에요라고 말할 수는 없어서 이렇게 말했다.

'자아성찰 했어요.'

반은 농담이었지만, 내 말에 사수는 풍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비웃었지만 자아성찰을 한 건 맞았다. 사실 그녀가 비웃을 법했다. 그녀는 외국어를 전공했고 그 언어를 마스터하기 위해 해당 국가에서 유학생활까지 하며 산전수전을 겪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볼 때는 나는 그저 집안에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고 인생의 의미나 찾아가며 세월을 낭비한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뭐 남들 다 하는 전공 공부, 토익 공부, 면접 준비 이런 것을 안하고 나의 내면에 대해 골똘히 생각한 건 사실이다. 그걸 많은 사람들이 시간낭비, 인생낭비라고 볼지는 모르겠다. 우울증을 겪었던 그 순간이 인생의 암흑기였노라고. 인생이 책이라면 그 페이지는 찢어버리고 싶고 숨기고 싶은 페이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그랬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그렇게 평가할지언정 나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순간이 다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모든 순간이 다 값진 순간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힘든 순간을 겪으면서 알게 된 교훈들이 있을 것이다. 그 순간들을 견뎌내면서 나는 삶의 소중함을 깨달았으니까 귀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어학연수나 자원봉사활동이나 자격증처럼 어떤 스펙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는 없었지만. 조금 더 미래에는 내가 당당히 그 시간들을 겪었다고, 이게 내 스펙이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도 오지 않을까? 


사람들이 그렇게 봐주지 않는다고 할지언정, 

내가 그렇게 만들겠다고.

이 순간이 의미 있었던 순간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도록 만들겠다고 다짐을 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울증 일기 80. 냉탕과 온탕 사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