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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2막

사(死)의 허무

by JINSOL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블라인드 쳐져 있는 창문으로 무언가가 휙 지나갔다. 블라인드 덕분에 실루엣으로만 보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무거운 무언가가 옥상에서 떨어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워낙 이 건물에는 공사가 많았고 늘 인부들이 드나들었으니까. 공사를 하던 사람들이 실수로 무거운 합판 같은 것을 떨어뜨린 거라고. 게다가 날카로운 비명이나 놀람의 소리침이 뒤따라오지 않았으므로 일부러 떨어뜨린 거라고 생각했다.


땅에서 쿵 하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린 걸로 보아 상당히 무거운 것이 떨어졌나 보다. 너무 무거워서 계단으로 이동하기에는 버거워서 옥상에서 떨어뜨렸나?

그래도 위험하게 말이지.



위험한 일을 벌이는 거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책상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그런 위험한 것을 떨어뜨리는 무심하고도 부주의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나는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그것’은 내가 예상했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탁자나 합판 따위라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사물조차 아니었다.



그랬다. 사람이었다. 어떤 40~50대로 보이는 남자가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처음에는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와 그 낙하하는 물체의 실루엣, 그리고 화단에 누워 있는 남자 그 세 가지의 연관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남자는 그냥 어쩌다 화단에 누워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곧이어 사람들이 하나둘 몰려오고 그 사람들이 허공을 응시했을 때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들도 처음에는 이 선후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곧이어 이해했다.


아, 이 사람이 옥상에서 떨어진 거구나.


하지만 어디 영화나 소설에서 묘사되는 끔찍한 모습이 아니라 그냥 술을 먹다가 화단에서 엎드려 자는 느낌이었다. 신체는 멀쩡했고 다만 의식이 없어 보였다. 피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아서 크게 다친 것 같지 않았다. 곧이어 구급차가 오고 그 사람은 실려 나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무슨 사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수군대는 바에 따르면, 그 사람은 스스로 뛰어내린 거였다. 다만 옥상에 유서 같은 거나 벗어놓은 신발 같은 건 없었다고 한다.



이것이 일 년여 정도 전에, 나의 직장에서 내가 최초로 본 극단적 선택 사건이었다.



지금은 이직했지만, 일 년 전의 내 직장은 좀 특이했는데 일반 사기업이 아닌 교육기관 중의 하나였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학교였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학교 건물 옥상에서 어떤 중년의 남자가 뛰어내린 사건이었다.


크게 다치지 않아 생명에 지장이 없을 줄 알았는데 사건이 있고 난 뒤 한 달이 지나서야, 나는 그 남자는 병원에 이송됐지만 숨을 거두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작은외삼촌의 죽음과 장례 절차에 따라 염을 하던 모습을 본 적이 있어서 ‘죽음’ 자체를 처음 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스스로 삶을 끝내는 장면을 목격한 건 내 생애 처음 있는 일이었다. 뭐, 이 일이 대부분의 사람에게 쉽게 일어나는 일은 아니겠지.


나는 그 남자의 죽음을 알고서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콕 집어 어떤 기분이라고 설명할 수 없었다. 묘했다. 우울증 환자의 말로여서 그런 것일까?

우울증이 심할 때 나도 저런 선택을 하게 됐을까?


그보다 더 나를 심란하게 만들었던 것은 ‘허무함’이었다.


내가 한 달이나 후에 그 남자의 죽음을 알았던 것은 그만큼 ‘아무런 일도 아닌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이 떨어진 그날 그 순간에만 약간 소란스러웠을 뿐이었다. 그냥 약간의 사고처럼 여겨졌고 다들 2시간도 채 되지 않아 다들 자기 할 일을 했다. 교직원들은 자기 일로 돌아갔고, 학생은 수업을 듣고. 나중에 경찰이 그 작은 공간에 폴리스 라인을 만들기 위한 테이프를 대충 갖다 붙여놓긴 했는데 의례적으로 하는 절차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큰 일이 났다고 생각은 안 했다. 그날 이후로 어떤 국화나 애도의 무언가가 있지도 않았다. 예전에 길가를 가다가 그곳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을 추모하는 무언가가 놓여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화단에는 그런 게 전혀 없었다. 그래서 허무했다. 그의 가족도 친구도 아무도 그의 죽음을 추모하고 기억하려는 사람이 없어 보여서.


내 이상한 감정 지분의 90%로 가 그 허무함과 허망함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다음 날 편의점으로 가서, 팩 소주 하나를 샀다. 출근길에 초록 병으로 소주를 들고 가긴 좀 그래서였다. 조금 일찍 출근해서, 선선한 가을 아침에, 아무도 없는 그 학교 건물 내 사무실 창문 바로 밑 그 지점에 나는 팩 소주를 까서 소주를 뿌렸다.


망자에게 바치는 술 한잔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그를 추모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를 기리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보지 못했을 뿐이었을 수도. 정말 그러기를 바랐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나 한 명이 절대 아니기를 바랐다.



의사 선생님과 그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상처 준 사람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으로 극단적 선택을 생각하기도 한다고…. 그러니까 이런 흐름이다. ‘나에게 상처를 많이 준 부모. 내가 죽으면 그제야 내가 얼마나 고통이 심했는지 알아주겠지.’ 이런 식의 생각 말이다. 하지만 상처를 준 사람들은 그들이 죽어도 개의치 않는다. 좀 찜찜할 수는 있어도 원래 그런 하던 대로 살아간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자신을 반성할 수 있었다면 애초에 타인에게 상처를 줄 사람이 아니었다.



죽음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타인의 기억 속에서도 사라지게 되고, 모든 가능성을 닫혀버린다.


힘든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죽음을 생각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것에 대해 가타부타 논할 필요도 없고 더군다나 난 그럴 자격이 없다.



그저 내가 목격한, 그 일에 대한 느낌은 ‘허무’라는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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