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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만 둘입니다만

형제맘의 목소리

by 이틀

어디 가서 아들만 둘이라고 하면 사람들의 시선은 금세 동정심으로 변한다. 아들만 둘이니 얼마나 힘들겠냐는 말에서부터 딸이 없어서 외롭겠네, 하나 더 낳아야하지 않겠냐는 말도 덧붙인다. 나이가 들면서 하나 더 낳으라는 말은 듣지 않게 되었지만 아들만 둘을 키우는 엄마에 대한 동정어린 시선은 변하지 않았다. 뱃속의 둘째가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친정엄마마저 손녀딸이 아닌 것을 서운해했다. 아들을 낳기 위해 딸을 세 명씩이나 낳았던 여자에게서 서운함이 보다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예전엔 아들 못 낳는 죄인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요즘엔 딸 없는 죄인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다.


나도 아들만 낳기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첫째도, 둘째도 딸을 원했다. 평생 남녀차별 속에서 서러움을 켜켜히 쌓아왔던지라 딸을 낳아 보란듯이 잘 키워보고 싶었다. 그러나 바라고 원하는 것을 쉽제 내어주지 않는 인생답게, 내 인생은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흘러간 곳에서 정신을 차려보니 아들 둘을 키우고 있었다. 나도 딸을 간절히 바랐던 사람이었다. 그러니 사람들의 동정어린 시선이 불편할 수밖에.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그나마 ‘흥, 그까짓 거, 딸이라고 쉬운 줄 아나?’하고 외면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너무 귀여웠고, 내 체력과 에너지가 그들을 감당하기에 충분했다. 딸 육아도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은근한 쾌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거 봐, 육아는 누구나 다 힘든것이야!!!’


아이들이 걷고, 몸집이 커지기 시작하면서 감당하기 힘든 순간의 빈도가 늘어났다. 남자 아이 한 명의 에너지가 100이라면 두 명은 200이 아니라 300이었다. 함께 있을 때 시너지 효과는 엄청났다. 집안은 늘 난장판이었고, 무언가 부서지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남자 친구가 놀러오는 날에는 집안에 깨질만한 물건들을 다 치워놓았다. 그렇게 해도 아이들이 놀고 간 집은 문고리가 부서지거나 고장난 장난감들이 거실에 널부러져 있었다.


언젠가 인스타그램에서 딸맘과 아들맘을 비교하는 영상을 보았다. 장소는 놀이터였다. 딸맘과 아들맘은 같이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다. 딸맘은 우아하게 의자에 앉아서 음료수를 마시다 한번씩 딸과 눈을 마주치며 웃어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아들맘은 의자에 앉을 새가 없었다. “하지마”, “그만해”, “만지면 안 돼”, “올라가지 마” 등을 말하며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그러다 결국 “이눔 시키!”하면서 아들을 쫓아가는 장면으로 영상은 끝났다. 너무 공감되고 웃겨서 남편에게 공유했다. 남편은 “남자 애들은 이게 건강한거야”라고 말했다. 놀다 보면 다칠 수도 있지, 남자 아이들이 다 그렇지 뭐, 라는 반응이었다. 엄마의 아들 육아는 안전하지 못한 대상이었고, 남편에게는 건강한 모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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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어렸을때는 외식을 하지 않았다. 아이들 때문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먹는 것이 힘들었다. 많은 육아서에서 앉아서 먹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했고, 나도 수없이 노력했지만 늘 실패했다. 아기 의자에 앉혀 놓아도 주변이 온통 흘린 음식물들로 지저분해져 주변 청소를 해주고 나와야 했다. 주변을 닦는 동안 또 가만히 있을 아이들이 아니었다. 아이들까지 정신없이 챙기다보면 외식이 아니라 어려운 미션을 수행하는 느낌이었다. 맛있는 음식을 음미하면서 먹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느낄 새가 없었다. 그럴바에야 집에서 먹거나 도시락을 싸서 공원에서 먹는 것이 편했다. 또 당시에는 '맘충'이라는 단어가 유행했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은 사회적 압박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는 단어였다.


언젠가 다른 가족과 식사모임 자리가 있었다. 외식을 잘 하지 않지만, 가족 모임 자리이니 아이들도 모두 데리고 참석했다. 지인 부부는 큰아이 또래의 외동딸을 키우고 있었다. 미취학 아동이 있는 것을 고려해 식사자리는 룸이었고, 좌식테이블로 예약했다. 조금은 편안한 자리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밥을 다 먹고 이야기를 하는 동안 아이들은 룸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 뛰기 시작했다. 당연히 내 입에서는 앉아, 가만있어, 조용히 해 등의 말들이 쉴새 없이 나왔다. 그러나 그들이 내 말을 듣고 가만히 앉아있는 시간은 고작해야 5분을 넘기지 못했다. 나는 어느 순간 포기했다. 룸에는 다른 손님들이 없었고, 우리만 있었다. 괜찮겠지 하는 마음으로 지인 부부와의 대화에 집중했다. 지인의 외동딸은 조용히 엄마 옆에서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더니 이야기가 길어지자 엄마 무릎에 얼굴을 대고 새근새근 잠들었다.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지인의 아내가 식탁 테이블 주변을 돌며 뛰어다니는 우리 아이들을 보며 말했다.


“식당 안에서 뛰다니, 우리 애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지, 아이들을 제지하지 않고 그냥 놔두는 나를 은근히 돌려까기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리며 뭐라고 대꾸해야할지 몰랐다. 뭔가 멋진 말로 되돌려줄 수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나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고, 무언가 말해야 할 타이밍도 놓쳤다. 그 뒤로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얼른 그 곳을 나오고 싶었다. 그러니까 외식은 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타이밍을 놓친 말은 집에 와서 투덜거림이 되었다.

“자기도 아들 둘 낳아 보라지!”

말을 뱉고도 흠칫 놀랐다. 욕이라고 한 말이 결국 누워서 침뱉기 아닌가.


나는 그들의 넘쳐나는 에너지를 빼주기 위해 주말에는 밖으로 돌아다녔다. 공원으로, 놀이터로, 산으로, 계곡으로. 캠핑도 자주 다녔다. 캠핑 짐에는 아이들 이유식과 기저귀까지 있었다. 밖에서 신나게 놀다 집으로 돌아온 아이들은 더이상 집안을 뛰어다니지 않았다. 이미 에머지를 다 빼고 와서 지칠대로 지친 그들은 누워서 책을 보거나 그림을 그리다 잠들곤 했다. 물론 나도 지쳐서 더는 집안일을 하지 못하는 단점도 있었다.


아들 육아가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들 육아가 빛을 발하는 시점은 아이들이 크면서부터였다. 돌아다니면서 먹던 아이들은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 단체생활을 배우며 나아졌고, 왕성한 식욕이 올라오며 살과 근육이 올라오는 시절부터는 알아서 식탁위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성별은 남자다. 이것은 아이들이 커가면서 엄마의 손을 점점 덜 필요로 한다는 말과도 같다.


나는 종종 온천이나 대중목욕탕을 즐겨 찾는다. 집 욕실에서 씻는 것과는 좀 다른 차원의 개운함이 있기때문이다. 둘째가 돌이 되기 전에는 남편과 내가 한 명씩 도맡아 남탕과 여탕으로 나누어 들어갔다. 그러나 아이들 둘다 걷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남편이 전담하게 되었다. 이것은 워터파크나 캠핑장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 샤워는 남편 담당이었고, 나는 여자 샤워실에서 여유있게 씻고 나올 수 있었다. 아이들 배변 훈련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캠핑장이나 공원에서 공중화장실을 가야 할 때면 아이들 뒤치닥거리는 남편의 몫이었다.


다행히 남편은 아이들을 챙기는 것을 귀찮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이들을 무척 사랑하는 아버지였고, 아이들과 잘 놀아주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우스갯소리로 좋은 남편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좋은 아빠인 것은 확실하다고 이야기해주곤 한다. 그리고 좋은 아빠였기 때문에 우리는 이혼의 위기를 여러 번 넘길 수 있었다.


아들이 감정적으로 섬세하지 못한 것도 어떤 면에서는 장점으로 작용했다. 워킹맘으로 살면서 아이들을 살뜰하게 챙기지 못했다. 어린이집 체험학습 가는 날에 도시락을 깜박할 때도 있었고, 단체사진 찍는다고 단체복 입고 오라고 하는 날에 혼자만 사복을 입고 가기도 했다. 준비물 제대로 못 챙기는 것은 말해 뭐하랴. 그럴때면 집단에 속하지 못하고 따로 떨어져 혼자 있을 아이를 생각하며 미안함과 죄책감에 발만 동동 구르다 퇴근했다. 퇴근해서 아이들에게 그날의 일에 대해 물어보면 해맑은 얼굴로 대답하곤 했다.

“친구 도시락 같이 먹었지!”

“다른 옷 입으면 어때, 괜찮아.”

나의 동동거리는 마음에 그들은 괜찮다는 말을 자주 해주었다. 그들의 대답은 어릴때 상처받은 내 마음까지 괜찮아지게 만들곤 했다.


아이들은 중학생이 되면서 키가 크고 힘이 부쩍 커졌다. 넘쳐나던 그들의 에너지는 근육을 키우고 키를 높였다. 그들의 키는 내가 닿지 못하는 곺은 곳에 닿고, 내가 끙끙거리며 들던 무거운 짐을 한 손으로 힘껏 들어올린다. 쩔쩔매던 엄마를 도와주며 그들은 한껏 뿌듯해한다. 사춘기 소년의 마음에 자신감이 가득차는 순간들이다. 언제 이렇게 컸나 싶어 아쉬움이 들다가도 부쩍 커진 그들의 체격에 맞는 큰 옷과 신발을 살 때면 나의 마음에도 뿌듯함이 올라온다. 잘 크고 있구나, 건장한 청년이 되어가는구나 싶은 마음이랄까. 나도 여자로서 작은 키는 아니지만, 조만간 나는 이 집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될 예정이다. 이미 신발은 가장 작은 사이즈가 되었고, 둘째가 작아서 신지 못하는 운동화는 내 차지가 되었다.


지금도 종종 딸 가진 다른 엄마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 그들의 관계나 소통, 그런 것들이 종종 부럽다. 그러나 아쉽지는 않다. 충분히 사랑하고 사랑받고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소유물이 아니니 딸이건 아들이건 떠나갈 생명들 아니던가. 내게 없는 것을 아쉬워하기보다 내게 잠시 머물다 가는 찬란한 생명들을 사랑하고 사랑하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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