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동맘의 목소리
아이를 하나만 둔다는 것은 늘 해명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아이가 하나에요?" 내 사정과 형편을 모르고 하는 질문이다. 지금은 사회 분위기가 바뀌어 이런 오지랖이 사라졌다고 들었지만 28년 전만 해도 빈번하게 주고받는 질문이었다. 그 물음은 대체로 공손한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때로는 해야 할 숙제를 안 한 사람에게 숙제를 제출받듯 당연했다. 나는 웃음으로 넘기기도 하고, 침묵으로 피했다. 운이 나쁜 날은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을 만났다. 그런 사람들은 조금 더 집요하다. 그런 사람에게는 “아직은요”라고 애매한 대답을 한다. 아직은 아니지만 계획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는 여지를 주고 자리를 피하는 것이다. 물론 거짓말이다. 나는 아이에게 동생을 만들어 줄 여건이 아니었으니까.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동생을 만들어주지 않고 뭐 하냐는 타박이 귓가에 맴돌곤 했다. 어떤 대답을 하든지 마음 한구석에는 늘 가느다란 파문이 남고 수많은 생각이 켜켜이 쌓였다.
외동아이를 키우는 집은 고요함이 깃든 봄날의 정원 같다. 바람조차 조심스레 머물다 간다. 사람이 드물게 방문하는 미술관처럼 고요한 날도 많다. 형제간에 싸움도 다툼도 없으니 당연하다. 장난감들은 제자리를 지키고, 아이의 빨래는 내가 감당할 만한 양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질서 정연하고 평화롭다. 한 아이의 웃음소리로도 집은 환했고, 마음은 충만했다.
아이가 말을 배우기 시작한 어느 날, 고요함 속에서 아이의 혼잣말을 들었다. 때로는 인형들과 진지한 대화를 했고 때로는 거울 속 자신을 향해 웃으며 말을 걸었다. 뭔가 재미있는 상상을 하는지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신기하고 재밌으면서도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저 작은 영혼이 얼마나 많은 세계를 혼자서 창조해 내고 있는 걸까, 그리고 그 창조의 뒤편에 혹시 형제에 대한 어떤 갈증이 숨어 있는 건 아닐까. 엄마가 곧 친구이고, 엄마가 곧 형제인 집에서, 나는 아이를 다독이며 동시에 나를 다독였다.
혼자 크는 아이를 지켜보는 일은 모순을 견디는 과정이었다. 혼자 잘 노는 모습에 안도하면서도, 그 씩씩함이 혹시 외로움의 다른 얼굴은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모든 사랑을 독차지하니 사랑이 부족하지 않을 거라고 위안하면서도, 그 사랑이 지나치게 무거운 건 아닐까 조심스러웠다. 저녁 무렵 놀이터에서 혼자 노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면, 저 작은 등이 세상의 무게를 다 지고 있는 듯 안쓰럽기도 했다. 그렇게 사랑과 불안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맞물리며 한 몸처럼 내 안에 자리했다.
아이는 혼자 놀기의 달인이 되어 블록으로 도시를 건설하고, 크레파스로 가족을 그렸다. 그림 속에는 언제나 엄마와 자신, 그리고 강아지나 고양이가 등장했다. “이 고양이는 내 동생이야."라고 말할 때면, 나는 그 말에 항상 조금은 무너졌고 아빠가 없는 상황을 만들어 준 게 미안했다. 혼자 크면서 없는 것을 있다고 믿고 부족함을 충만함으로 바꿔내는 마법 같은 능력이 생긴 거니? 엄마로서 아이의 혼자 놀이를 지켜보는 일은 기쁨만큼이나 아픔을 동반했다. 저 씩씩함이 혹시 숨어있는 외로움의 다른 이름은 아닐까. 저 창조적인 상상력이 혹시 결핍에서 피어난 꽃은 아닐까. 지금 생각하면 크게 부풀린 걱정이었지만 당시에 나는 아이를 품에 안으며 우리는 충분하다고, 완전하다고 되뇌면서. 나 자신을 달랬다.
세상은 종종 우리에게 기준점을 제시한다. 두 아이가 뛰어노는 가정이 이상적이고, 형제자매가 있어야 사회성이 길러진다고, 하나뿐인 아이는 이기적으로 자랄 수밖에 없다고. 그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나는 마음 한구석이 움츠러드는 것을 느낀다. 혹시 내가 아이에게 불완전한 세계를 물려준 건 아닐까. 혹시 내 선택이 아이의 미래를 제한한 건 아닐까.
만약 그 시절로 돌아가 “외동을 키우면 육아가 편하죠?”라는 부러움 섞인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을 해 줄 것이다. 외동을 키우는 건 봄날의 정원을 거니는 것 같으면서도 안개 낀 창문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고. 뿌옇게 흐린 유리 너머로 무엇인가 보이지만, 그 형태가 선명하지 않아 불안했다고.
저녁 식탁에서 아이와 마주 앉아 하루에 관해 이야기했다. 아이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생생하게 들려주고, 나는 어른의 세계에서 건져 올린 작은 지혜들을 들려줬다. 우리의 대화는 깊고 농밀해졌다. 우리 둘만의 세계는 전혀 작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섬세하고 특별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외동아이로 자란 지 10년이 지나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무게를 혼자 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작은 등이 곧고 단단해지는 중이었다.
하나라서 불안하고, 하나라서 특별하다. 하나라서 외롭고, 하나라서 충만하다. 이 모순된 감정들이 내 마음속에서 계절처럼 번갈아가며 찾아온다. 그러나 이제 나는 이해한다. 이 모순이야말로 외동 맘의 일상이라는 것을. 불완전함과 완전함이 공존하는 이 미묘한 균형 위에서, 아이와 나는 오늘도 우리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하나뿐이라는 것이 결핍이 아니라 선택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선택안에서도 충분히 풍요로운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으며, 나는 오늘도 엄마보다 덩치가 커버린 아이의 손을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