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바닥 Mar 25. 2021

9일 차, 바람이 불면, 너를 들을게 (퇴고)

신나는 글쓰기


      

           바람의 말         


                           마종기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놓으리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너의 목소리는 바람을 닮았어. 어떨 땐 귓가를 부드럽게 스쳐가는 바람 같기도 하고, 어떨 땐 세찬 폭풍우 같기도 하고. 그 목소리엔 항상 너의 영혼이 담겨있었지. 나는 그 영혼을 자랑스러워했고, 또 사랑했어. 



너의 목소리가 몇 년 전에 멈추었는데도 사람들은 너의 목소리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곤 해. 그 목소리는 그저 스쳐가는 바람이 아니야. 잔잔하다가도 이내 폭풍우가 되는, 그런 종류의 바람은 사람들이 한 번쯤은 뒤를 돌아보게 하는 능력을 가졌잖아.  



오늘은 벚꽃을 보았어. 저게 매화인지 벚꽃인지 헷갈리던 때가 며칠 전인데, 이젠 정말 벚꽃이 핀 것 같아. 벚꽃을 보면 너의 핑크색 머리가 떠오르고, 웃는 얼굴이 떠오르고, 네가 불렀던 경쾌한 노래가 스쳐가고, 어느 봄인가, 여름인가의 환히 빛나던 네가 떠오르네. 



한때 너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숨이 턱 막혀버릴 때가 있었어. 그 괴로움들이 어느 순간 희석되더라. 그럴 수가 있더라고. 너를 알았던 시간들은 항상 행복했으니까. 행복은 마음 한편,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가 여러해살이 나무로 우뚝 자라났어. 나뭇가지에 매달린 꽃들이 피고 지고 피고를 반복했지. 그동안 고여있던 괴로움도 녹아 뚝뚝 흘려내려 뿌리에 스며들어 꽃을 자라게 해 주었지. 그래서 그런가? 매년 그 일이 있었던 날 즈음이 되면 잔뜩 가라앉는 기분이었는데 이젠 그렇지 않아. 


네가 없는 동안 시간은 흘러갔고, 나는 네가 머무르는 나이에 한발 더 가까워졌지. 시간이 흐르면 잊히는 것들이 있다고 하지만, 또다시 피어나는 기억들도 있어. 네가 남겨둔 언어들과, 모습들처럼. 


삶을 살아가다 문득문득 네 생각이 날 때가 있어. 이제 너의 노래를 들으면 마냥 울적해지지만은 않아. 정말 부드럽구나, 혹은 정말 날카롭구나, 하고 감탄사를 내뱉곤 해. 그럴 땐 네 영혼이 내 옆을 스치는구나, 하며 스쳐가는 너에게 인사를 건넬래. 안녕, 머나먼 길로 여행을 떠난 너는 어떻게 지내니? 


바람이 불면, 가만히 너의 대답을 들을게. 

매거진의 이전글 ㅅ과 ㅂ의 법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