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생존을 위한 필수 용어 해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마치 다른 언어를 배우는 것 같은 순간이 온다. 분명 한국어인데, 도무지 처음 들어서는 뜻을 알 수 없는 말들이 오고 간다.
직장이라는 이 험난한 정글 속에 막 발을 딛던 시절 누군가 “이번 프로젝트 킥오프 미팅에서 나래비 좀 세워보자”라고 했을 때, 킥오프와 나래비는 또 무슨 종목인가 싶은 생각을 한 적이 있는가?
누군가에게는 용어를 알아가는 시간이 되기를, 또 타칭 고인물인 누군가에게는 공감이 되기를 바라며 아래 몇 가지 용어를 정리해 보았다.
“이번 분기 목표는 조금 챌린지 하게 잡았어.” 처음 들었을 땐 ‘도전적’이라는 뜻으로 쓰는구나 싶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무리수를 뒀다’는 의미로도 쓰인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 직장에서는 단순한 도전이 아니라, 어느 정도 무리해야 챌린지하는 것이다.
프레젠테이션 자료라고 하면 될 것을 왜 ‘장표’라고 부를까? 처음엔 어색했지만, 어느새 나도 “장표 몇 장 만들어 주세요”라고 자연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엑셀, 워드, 파워포인트까지 모든 문서는 장표가 된다. 5번 슬라이드라고 부를 때도 많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장표의 개수일지도...
“이거 ASAP으로 부탁드립니다.” 처음엔 ‘에이에스에이피’라고 읽었지만, 어느 순간 다들 “아삽”이라고 줄여서 말하는 걸 보고 나도 자연스럽게 따라 하게 됐다. 뜻은 단순하다. “당장 해!”
그리고 ‘기안’이라는 단어도 있다. 사실 공문을 올릴 때만 쓰는 줄 알았는데, 보고서든, 구매 요청서든 뭐든 문서를 올리면 다 기안이다. 영어로는 proposal 정도 될 수도 있겠다. ‘기안 좀 올려줘’라는 말은 곧 ‘네가 써서 네 책임으로 올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나래비를 세운다는 말을 육성으로 직접 들었을 때는 정말 충격이었다. 나래비”는 일본어 “並び(ならび, narabi)”에서 온 말이다. ‘줄을 세운다’는 뜻이지만, 업무에서는 ‘우선순위를 정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보고서를 나래비 세우고, 일정도 나래비 세운다. 때로는 priority를 정하다라고 쓰기도 한다. 직장인은 어쩌면 평생 나래비를 맞추며 살아가는 걸 수도.
회의에서는 ‘아젠다’를 정해야 하고, 중요한 사항은 ‘크로스체크’를 해야 한다.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킥오프’ 미팅을 한다. 즉, 회의 ‘주제’를 정하고 중요한 사항은 ‘교차 확인‘을 하며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시작 미팅’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말을 안 쓰고도 충분히 회의할 수 있지만, 쓰면 뭔가 더 있어 보인다. ‘오늘 회의 주제는 뭡니까?’보다는 ‘아젠다 정리해 주시겠어요?’가 더 프로페셔널하게 들리는 법이다.
업무 지시를 받을 때 ‘러프하게 리스트업 해달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즉, 완벽할 필요 없이 대충 목록을 만들어 보라는 뜻이다. 하지만 직장인의 경험상, ‘러프하게’라고 했던 상사가 나중에 ‘왜 이렇게 러프하냐’며 수정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러프하게 리스트업 하라는 말은 ‘완벽하게 하지만 티 나지 않게’ 하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거 팀원들이랑 얼라인 맞추고 공유해 주세요.” 얼라인(align)은 직장에서 자주 쓰이는 말인데, ‘의견을 조율하고 방향을 맞춘다’는 의미다. 다 같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 조정하는 과정이랄까. 얼라인을 맞춘 뒤에는 반드시 ‘피드백’을 받아야 한다. 즉, 상사나 동료의 의견을 받고 수정하는 과정이 필수다. 피드백을 받으면 일이 끝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수정 지옥이 시작될 뿐이다.
“이 프로젝트에 저도 인볼브 될 수 있을까요?” 인볼브(involve)는 참여한다는 뜻인데, 단순한 참여가 아니라 깊숙이 개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 말을 쓰는 순간, 단순한 참관자가 아니라 실무자로서 책임을 지게 된다는 뜻이다.
업무를 진행할 때 ‘스코프(scope)’를 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즉, 프로젝트의 범위를 정하는 것. 그리고 그 범위 안에서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리소스(resource)’가 있는지도 체크해야 한다. 여기서 리소스는 사람일 수도 있고, 예산이나 장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직장에서는 결국 ‘사람’ 일 때가 많다. “이거 할 리소스가 부족한데요?”라는 말은 곧 “우리 팀에 사람이 부족한데요?”라는 의미다.
직장 용어, 익숙해질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처음엔 낯설고 어색하지만,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이런 말들을 자연스럽게 쓰고 있다. ‘회의 준비됐나요?’보다는 ‘아젠다 공유됐나요?’라고 말하고, ‘우선순위 정해주세요’ 대신 ‘프라이오리티 좀 정해주세요’라고 한다. 아마 소위 판교 사투리라는 말까지 있는 거 보니 어쩌면 이런 용어가 모여 또 하나의 언어를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지금 이 시각에도 온갖 무서운 용어가 난무하는 정글터에서 분투 중인 모든 직장인께 이 글이 조금이라도 웃음을 선사했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