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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란도 May 23. 2024

아침놀 Morgenröthe

니체의 아침놀/ 서문 전문




*** 이 매거진은 니체 철학책 낭독 후에  

     마음이 가는 대목들을 옮기고 코멘트를 달아 놓거나

     또는 그에 상응하여 일어나는 저의 생각을 쓴 글을 올리려고 합니다.

     아침놀은 지금 낭독하는 책이므로 아침놀 글부터 올리겠지만

     그동안 썼던 니체 관련 글 역시 이곳에 같이 모아 놓으려고 합니다.








아침놀 Morgenröthe(모겐로유트)  


서문 * 각 장 제목을 붙여 보았다.   


       






1. <강도强度의 세계에서/ Intensity Spatium>     


         이 책에서 사람들은 '지하에서 작업하고 있는 한 사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뚫고 들어가고, 파내며, 밑을 파고들어 뒤집어엎는 사람이다.     


그렇게 깊은 곳에서 행해지는 일을 보는 안목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가 얼마나 서서히, 신중하게, 부드럽지만 가차 없이 전진하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빛과 공기를 맛보지 못하면서도 한마디 고통도 호소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가 자신이 행하고 있는 어두운 일에 만족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어떤 신념에 의해 인도되고 있고, 그의 노고가 어떤 위로를 통해 보상받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가? 그는 자신이 [결국] 무엇에 도달하게 될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즉 자신의 아침, 자신의 구원, 자신의 아침놀에 도달하게 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긴 암흑과 이해하기 어렵고 은폐되어 있으며 수수께끼 같은 일을 감수하는 것이 아닐까.


분명히 그는 되돌아올 것이다. 땅속에서 그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그에게 묻지 말라. 트로포니오스Trophonios(신탁을 내리는 신, 지하에서 자신의 신탁을 전했다) 같은 이 지하의 인간은 다시 '인간이 될' 때 비로소 그대들에게 반드시 그것에 관해 말할 것이다. 그와 같이 오랫동안 두더지처럼 그리고 홀로 존재했다면 사람들은 침묵하는 것을 완전히 잊고 마는 것이다.


              



2. <자기 자신만의 길을 걷는 사람>     


         내가 저 지하에서 무엇을 하려 했는지 이 뒤늦은 서문에서 그대들에게 말하겠다. [이 서문 대신에] 자칫하면 추도문이나 조사가 실릴 뻔했다. 나는 돌아왔지만, 그곳에서 간신히 빠져나왔기 때문이다. 내가 그대들에게 동일한 모험을 요구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또한 내가 맛본 것과 동일한 고독이라도 맛보라고 요구한다고도 생각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렇게 자기 자신만의 길을 걷는 사람은 아무도 만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만의 길'을 걷게 되면 그런 결과를 맞이하기 마련이다. 이 경우 그를 도우러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닥쳐올 위험, 우연, 악의, 악천후 같은 모든 것을 그는 홀로 해결해야 한다. 그는 자신의 길을 홀로 간다. 따라서 그가 [자신이] '홀로'라는 사실에 대해 괴로워하고 가끔 짜증을 내는 것은 당연하다. 그의 친구들마저 그가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는지 추측조차 할 수 없고, "뭐라고? 어쨌든 그가 가고 있다고? 그에게 아직 길이 있다고?"라고 가끔 서로 묻는다는 사실을 그 또한 알고 있기 때문에 그는 고독하게 된다.     


당시에 나는 아무도 할 수 없고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시도했다. 나는 깊은 곳으로 내려갔고 바닥에 구멍을 뚫었으며, 우리 철학자들이 수천 년 동안 신봉해 온 낡은 신념을 주사하고 파고들기 시작했다. 철학자들은 이 신념이 가장 확실한 지반인 것처럼 그 위에 [철학을] 세우곤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 위에 세워진] 모든 건축물은 거듭 붕괴되었다. 나는 도덕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대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가?               




3. <도덕을 방어하기 위하여 칸트는 이성을 비판했는가>  

   

         선과 악에 대해 지금까지 이루어진 고찰은 조악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선과 악에 대해 고찰하는 것은 항상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다. 양심, 좋은 평판, 지옥, 경우에 따라서는 경찰 역시 솔직함을 허용하지 않았고 지금도 허용하지 않고 있다. 모든 권위와 마찬가지로 도덕 앞에서도 따져서는 안 되고 더구나 말해서도 안 된다. 여기서는 복종만이 허용된다!      


세계가 생겨난 이래, 자신을 비판의 대상으로 만드는 권위는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더구나 도덕을 비판한다는 것, 도덕을 문제로 삼고 의문시한다는 것은 비도덕적인 일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지금도 비도덕적인 일이 아닐까? 그러나 도덕이 비판의 손길과 고문 도구를 물리치기 위해 위협적인 수단만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도덕의 공고함은 오히려 일종의 마술에 근거한다.     


그것은 '열광시키는' 마술을 알고 있고, 이 마술을 구사하는 데 정통하다. 도덕은 종종 단 한 번의 눈길만으로도 비판적인 의지를 마비시키고, 심지어 자기편이 되도록 유혹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경우에 따라서 도덕은 비판적인 의지로 하여금 [비판적인 의지] 자신에게 등을 돌리게 하면서 전갈처럼 자신의 몸에 가시를 찌르게 한다. 도덕은 아주 옛날부터 모든 종류의 사악한 설득 기술에 정통했다.     

 

오늘날에도 도덕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 연설가는 없다(예를 들어 무정부주의자들이 연설하는 것을 들어보라.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그들이 얼마나 도덕적으로 말하는지! 심지어 그들은 자신들을 ‘선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이라고 칭한다).      


세상에서 연설과 설득이 이루어진 후 도덕은 유혹하는 방면에서는 최고의 대가로 입증되어 왔다. 그리고 우리 철학자들과 관련해 말하자면 도덕은 철학자들을 유혹하는 키르케로 입증되어 왔다.     


왜 플라톤 이후 유럽의 모든 철학적 건축가들의 작업이 헛수고에 불과했는가? 왜 그들 자신이 진심으로, 그리고 진지하게 ‘청동보다 영구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붕괴할 위기에 처해 있거나 폐허로 변했는가?  * 청동보다 영구하다’는 말은 호라티우스 <송가>에 나오는 구절이다. 여기서 청동은 로마법이 새겨진 청동 판을 가리킨다.     


사람들은 이러한 물음에 대해 “그들 모두가 전제가 되는 작업인 기초의 검토, 즉 이성 전체에 관한 비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칸트의 답변을 제시하지만 이 답은, 아아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그 후 재앙을 초래하게 된 칸트의 이 답변은, 우리 근대 철학자들을 정말로 더욱 견고하면서도 덜 기만적인 지반으로 이끌지 못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성이라는] 하나의 도구에게 자신의 우수성과 우위를 비판하도록 요구한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닌가? 지성 그 자체가 자신의 가치, 자신의 힘, 자신의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모순이 아닐까?     


오히려 [위의 물음에 대한] 올바른 답은 칸트를 포함한 모든 철학자들이 도덕의 유혹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자신들의 철학 체계]를 세웠다는 것일 것이다. 그들은 겉으로는 확실성과 ‘진리’를 지향했지만, 칸트의 순진한 말을 다시 한번 사용하자면 사실 ‘존엄한 도덕적 건축물’을 지향했다.      


칸트는 ‘저 존엄한 도덕적 건축물을 위한 지반을 정비하고 튼튼하게 하는 것’을, 자신의 ‘그렇게 빛나지는 않지만 공적이 없는 것은 아닌’ 과제와 일이라고 보았다(《순수이성 비판》Ⅱ, 257쪽).    

 

아아, 그렇지만 우리는 오늘날 그가 성공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광신적인 의도를 가졌던 칸트는 다른 어떤 세계보다도 광신의 세기라고 부를 만한 그의 세기의 진정한 아들이었다. 다행한 일이지만, 그는 좀 더 가치 있는 면과 관련해서도 자신이 살던 세기의 진정한 아들이었다( 예를 들어, 그는 자신의 인식론에 상당한 정도의 감각주의 [경험론]을 수용했다).     


칸트 역시 도덕의 독거미인 ‘루소’에게 물렸다. 칸트 영혼의 밑바닥에도 도덕적 광신이 숨어 있었다. 이러한 도덕적 광신의 집행자로 자부했고 자신을 그러한 집행자로서 공언했던 사람은 루소의 다른 제자인 ‘로베스피에르’였다. 로베스피에르는 “지상에 예지와 정의와 덕의 나라를 건설”(1794년 6월 7일)하려고 하였다.

    

다른 한편에서 볼 때 프랑스인의 이러한 광신을 마음속에 품고 있으면서도 그와 같은 것을 칸트보다 더 비(非) 프랑스적으로 심오하고도 철저하게, 그리고 독일적으로(‘독일적’이라는 말이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허용된다면) 추구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자신의 ‘도덕적 왕국’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이 증명할 수 없는 세계, 즉 논리적인 ‘피안’을 상정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이 때문에 그는 자신의 《순수이성 비판》이 필요했던 것이다.      

달리 말해, 칸트에게는 ‘도덕의 왕국’을 이성이 공격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 아니 오히려 파악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다른 모든 것보다 중요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순수이성 비판》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사물들의 도덕적 질서가 이성에게 공격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강하게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과 역사와, 자연과 역사의 근본적인 비도덕성을 목도했던 칸트는 이전의 모든 훌륭한 독일인과 마찬가지로 비관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칸트는 자연과 역사를 통해 도덕이 증명되었기 때문에 도덕을 믿은 것이 아니다. 자연과 역사를 통해 도덕이 끊임없이 반박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덕을 신뢰했다.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이해하기 위해 또 하나의 저 위대한 비관주의자인 ‘루터’에게 존재하는 유사한 점을 상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루터는 정말이지 루터다운 대담성으로 자신의 친구들로 하여금, “그렇게 많은 분노와 악의를 내보이는 신이 얼마나 은혜롭고 정의로운지를 우리가 이성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신앙이 필요하겠는가?”라는 사실을 깊이 명심하게 했다.      


모든 추론 중에서,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가장 위험한 이러한 추론은 진정한 모든 로마인에게는 정신에 반하는 죄였던 반면, 옛날부터 독일인의 혼에게는 가장 강한 인상을 주었고, 그들의 혼을 가장 강하게 유혹했다. 이러한 추론과 함께 독일 논리학이 처음으로 기독교 교의의 역사에 등장한다.    

  

그러나 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오늘날의 우리 독일인, 즉 후대의 독일인은 모든 점에서 저 유명한 변증법적인 근본 명제, 즉 ‘모순이 세계를 움직이고, 모든 사물은 자기 자신에게 모순적이다’라는 명제가 어느 정도 참되며 진리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명제를 통해 헤겔은 당시의 독일 정신이 유럽에게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우리는 논리학에 대해서까지도 정녕 비관주의자인 것이다.               



4. <양심의 인간과 최후의 도덕>     


        그러나 논리적인 가치 판단들이 우리의 용감한 의심이 내려갈 수 있는 가장 밑바닥에 있는 근본적인 것은 아니다. 이러한 판단들의 타당성은 이성에 대한 신뢰에 의존하는데, 이러한 신뢰는, 신뢰로서 하나의 도덕적 현상이다.     


어쩌면 독일적 비관주의는 이제 최후의 발걸음을 내딛어야만 하지 않을까? 어쩌면 독일적 비관주의는 다시 한번 가공할 방식으로 자신의 믿음과 불합리를 양립시켜야 하지 않을까? 이 책이 도덕에 대한 신뢰를 넘어 도덕에 대해서까지 비관주의적이라면, 이 책이야말로 정 독일적인 책이 아닐까? 왜냐하면 이 책은 사실 하나의 모순이며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은 도덕에 대한 신뢰를 철회한다. 왜냐고? 도덕에 충실하기 위해서! 그렇지 않으면 이 책에서(즉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뭐라고 불러야 하겠는가? 좀 더 겸손한 말을 좋아하는 게 우리의 취미다.      

그러나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은, 우리에게조차 ‘너는 해야 한다’는 당위가 말을 걸어오며, 우리조차 우리 위에 존재하는 엄격한 법칙에 복종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조차 들을 수 있고, 직접 수행할 수 있는 최후의 도덕이다.     


이러한 최후의 도덕을 따른다는 점에서는 우리조차 아직은 ‘양심의 인간’이다. 즉 우리는 시대에 뒤떨어지고 썩어 문드러진 것으로 여겨지는 것, 즉 신이든 진리든 정의든 이웃 사랑이든 무언가 ‘믿지 못할 것’으로 되돌아가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양심의 인간’이다.     


그리고 우리는, 낡은 이상으로 통하는 거짓된 다리를 우리에게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 우리 내면에서 중재하고 혼합하고 싶어 하는 모든 것에 대해 철저히 적대적이라는 점, 현재와 같은 모든 신앙과 기독교적인 것에 대해서 적대적이라는 점, 모든 고식적姑息的인 낭만주의와 조국애에 대해 적대적이라는 점, 우리가 더 이상 믿지 않는 것을 숭배하라고 우리를 설득하고 싶어 하는 예술가의 향락주의와 예술가들의 양심의 결여에 대해 적대적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사람들을] 영원히 자신에게 끌어들이면서 이와 함께 영원히 ‘끌어내리는’ 유럽의 여성적 경향 전체(이상주의)에 대해 적대적이라는 점에서 ‘양심적인 인간’이다.  * 고식姑息/ 잠시 숨을 쉰다는 뜻으로, 일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임시로 둘러맞춰 처리하여 당장에는 탈이 없고 편안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이렇게 양심적인 인간으로서만, 오늘날 도덕을 부정하는 사람이자 신을 상실한 사람들인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수천 년에 걸쳐 내려온 독일적인 진실성과 경건에 가까운 사람들로 느끼게 된다.      


비록 그러한 덕들을 계승하는 가장 의심스러운 최후의 후예일지라도 말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들의 상속자이자 그것들의 가장 내적인 의지, 즉 기쁘게 부정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비관주의적인 의지의 집행자로 느낀다.      


하나의 정식定式으로 표현하자면 우리 내면에서는 도덕의 자기 지양이 수행된다.

              



5.  <느린 가락 lento의 친구들>     


       그러나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무엇이고, 무엇을 원하며, 무엇을 원하지 않는지를 우리가 그렇게 소리 높여 열심히 말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좀 더 냉정하게, 좀 더 멀리, 좀 더 영리하게, 좀 더 높이 보자. 우리는 그것을 우리끼리의 이야기인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넘겨 듣거나 듣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말하자! 무엇보다도 우리는 천천히 말하자.     


이 서문은 늦게 씌어졌다. 그러나 너무 늦지는 않았다. 사실 5,6년이 걸린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이러한 책, 이러한 문제는 서두를 필요가 없다. 더구나 우리 둘, 즉 나와 나의 책은 느린 가락lento의 친구들이다. 


내가 문헌학자였던 것이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 아마 나는 여전히 문헌학자다. 즉 천천히 읽는 것을 가르치는 교사 말이다. 결국 쓰는 것도 느려진다. ‘서두르는’ 모든 인간을 절망하게 만들지 못할 경우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는 것, 이것은 내 습관일 뿐만 아니라 취미이기도 하다.  

    

이런 취미는 악취미일까? 요컨대 문헌학은 지극히 섬세하고 신중한 작업을 수행해야 하고 천천히 수행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말Wort의 금세공술’이자 ‘말에 정통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것으로서 문헌학은 다음의 한 가지 사항, 즉 그것의 숭배자들에게 우회해서 가고, 여유를 갖고 조용해지고, 느려지는 것을 다른 모든 것보다도 요구하는 저 존중할만한 기술이다. 


바로 이 때문에 문헌학은 지금까지 보다 오늘날 더 필요하다.     


오늘날은 ‘노동’의 시대, 즉 모든 것을 곧바로 ‘해치우고’, 오래된 책이든 새로운 책이든 성급하고 품위 없이, 비지땀을 흘리면서 곧장 해치우는 속전속결의 시대다. 문헌학은 이러한 시대의 한가운데서 우리를 가장 강하게 끌어당기고 매료시킨다.


문헌학 그 자체는 그렇게 쉽게 무언가를 해치우지 않는다. 그것은 잘 읽을 것을 가르친다. 문헌학은 깊이 생각하면서 결론을 성급하게 내리지 않고, 섬세한 손과 눈으로, 천천히, 깊이, 전후를 고려하면서 읽을 것을 가르친다.      


인내심 강한 나의 벗들이여, 이 책은 오직 완벽한 독자와 문헌학자만을 원한다. 나를 잘 읽는 것을 배우라.     

                                                                        

                                                                                                                                1886년 가을

                                                                                                제네바 교외 루타에서





#니체_아침놀 #플레시몹낭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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