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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란도 Jun 26. 2024

메타인지란 무엇인가?

언어와 사고에 대한  인터넷  기사에 대한 ' 이런 생각




 *   구조론 사이트에 링크된 기사를 보며 메모했던 내용이다. 시간 지나면 굳이 이걸! 왜? 공개해야 하나?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하지만 나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은 사람이 많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어서, 기록 차원에서 올린다. 생각한다고 해서 다 생각은 아니다. 뇌가 자극된 흔적이 있어야 생각이니까. 지금 내가 올리는 이 생각은 나의 알파이자 오메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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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알고 있는 것을 것을 검증, 세계에 대한 나의 존재 검증과 같아서 심히 온몸이 타들어 가는 것 같은 그 뜨거운 불태움! 그러나 나는 이번에는 사양한다. 한 번이면 족하고 반복되면 그것은 중독이다. 왜냐하면 양상은 늘 달라지기 때문이다. 진정한 것은 갈수록 그 자신의 에너지가 업그레이드되는 것에 있다. 그리고 그러한 표현이 그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는 것에 있지 않다면! 그것은 아직 더?


이렇다 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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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사고의 핵심" 수천 년 철학계 정설 뒤집히나? (뉴스 기사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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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생각


영역이 다른 것은 신체와 연결되는 기능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사고한 것을 바탕으로 말하고 글을 쓴다.

철학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사고한 것을 옮기는 것이며, 그 사고를 맥락에 맞게 재구성하는 것이다. 예컨대 직관은 그대로 받아쓰기하면 문장이 앞 뒤가 안 맞고 구멍이 많다. 머릿속에서는 완벽하여 깨달음의 전율이 있는데, 막상 머릿속에 떠오른 그 문장들을 써보면 빈 구멍 투성이다. 그것을 메꾸어야 한다. 그리고 그 빈 구멍 채워가는데 또 사고가 요구된다.


이 과정은 메타적이다. 메타적인 방법으로 진행된다. 메커니즘을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적으로 말하면 “조용한 영혼의 내적 대화”이다. 즉 영혼이 만들어져야 그때 이것의 연결이 가능해진다. 영혼을 작동시킬 수 있어야 하며 이 영혼의 이것들을 연결할 때 사고를 언어로, 특히 글쓰기로 옮길 수 있다. 반면에 우리가 대화할 때? 얼마나 영혼과 대화를 나눈다고 여길까?


영혼이란 표현은 하나의 세계의 주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영혼은 감성의 주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 표현이 무엇이건 간에 '영혼'이라고 옛 사람들이 표현하여 썼고, 달리 특정한 말이 없기에 요즘 사람들도 영혼이라고 쓰는 것이다. 자기 안에 세계를 통하여야 사람은 자기 글을 쓸 수 있고, 자기 말을 할 수 있다.


횡설수설한다면 분리된 것이고 잘 연결이 안 되고 있는 것이다. 메타인지가 안 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이나 어떤 것을 수행하는데 무리가 없다면 이미 메타인지가 잘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기본 장착된 하나의 레이어라면, 또 하나의 레이어는 그 자신이 발견한 빈 구멍에 의하여, 그것을 메꾸려고, 자신 안에서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창작의 레이어다. 창작은 레이어 위에 레이어를 덧 씌운 것이다. 그러니 이 레이어에는 주관자가 있다. 그 세계의 자아가 있는 것이다. 즉 그 세계의 정서가 있는 것이며 그 세계의 감성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철학자나 예술가나 말하는 진짜 영혼일 것이다. 빈구멍 발견과 구멍 메꾸는 작업은 근원과 연결된다. 자신의 근원은 세계의 근원이기도 하다. 근원과 연결되어야 치유가 가능하고 깨달음이 가능하고 직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형이상학적인 웃음이 있다. 이것이 플라톤이 말하는 '조용한 영혼의 내적 대화'일 것이다. 물론 플라톤 입장에서는 철학만 해당될 것이다. 예술은 그 단계에 있지 못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관조에서 아폴론적 관조 상태만이 최고의 단계로 본 것일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 후의 철학자들은 예술이 바로 그 연결 그 자체라는 것을 발견하고 증명하였고, 그것에 관한 글을 썼다. 플라톤 이후의 모든 철학은 빈구멍 발견과 메꾸는 메커니즘에 관한 것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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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일부러 붙여 썼다. 이것에 대해선 각자의 소관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렇게 쓰고 보니 요점은, 바로 이거다.


취향은 자유이지만, 표현의 자유는 그 자신의 창작으로 해결하고 그 외에는 공통의 룰을 지킬 때 편안하고 자유롭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기준이 어디에 있는가? 이다. 그 시간만 채우는 그 자체는 이기적이지만, 문제는 타인도 그 빈 시간만을 메꾸워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상대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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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이 기사의 전반적인 내용은 문제가 있어 보인댜. 왜냐하면, 인간은 말이 되지 않는 '아무 소리'에는 본래 반응하지 않는다. 즉 그것은 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아무 소리는 어떤 것의 지속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뇌가 반응하지 않고 동시에 활성화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직 말이 개념화 되지 않았기 때문에 반응이 없는 것이다. 불일치이기 때문이다. 일치에서만 공통반응이 일어난다. 바로 이것이 소통의 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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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 일어나는 생각대로 썼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 이렇게 말을 한 사람을 본 적은  없다. 다만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는 있다. 이것이 철학책 읽는 것에서 나와 기존 철학  해석들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나의 관점을 거칠 때 어떤 물기없이 처진 것들이 내안에서 생명럭 있게 되살아 나는 것은 본다. '바로 그 지점이 나의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알게 된 것이 있다면 바로 그것 뿐이다. 이 말은 내가 나를 이제는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알아야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철학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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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의 제목은 '홍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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