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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란도 Dec 15. 2024

왼쪽 가슴에 손을 얹는 행위 - 소년이 온다

탄핵가결과 과거가 현재를 돕는 행위의 연속성

1.

특별하게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다.

처음 자료를 접하며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연행할 목적도 아니면서 반복적으로 저질러진 살상들이다. 죄의식도 망설임도 없는 한낮의 폭력. 그렇게 잔인성을 발휘하도록 격려하고 명령했을 지휘관들.


1979년 가을 부마항쟁을 진압할 때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은 박정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캄보디아에서는 이백만명도 더 죽였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위가 확대되었을 당시, 군은 거리에서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화염방사기를 발사했다.


인도적 이유로 국제법상 금지되어 있던 납탄을 병사들에게 지급했다. 박정희의 양아들이라고 불릴 만큼  각별한 신임을 받았던 전두환은, 만에 하나 도청이 함락되지 않을 경우 전투기를 보내 도시를 폭격하는 수순을 검토하고 있었다. <소년이 온다 206쪽>



2.

2009년 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소년이 온다 207쪽>



3.

썰물처럼 빠져나간 공권력을 대신해  도청에서 시민 자치가 시작되었을 때, (...) 광주 무정부 상태 5일째. 사진 속의 검게 그을린 건물들. 이마에 흰 띠를 두른 남자들로 가득한 트럭. <소년이 온다 208쪽>



4.

특별히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특별히 소극적인 군인들이 있었다.

피 흘리는 사람을 업어다 병원 앞에 내려놓고 황급히 달아난 공수부대원이 있었다. 집단발포 명령이 떨어졌을 때, 사람을 맞히지 않기 위해 총신을 올려 쏜 병사들이 있었다. 도청 앞의 시신들 앞에서 대열을 정비해 군가를 합창할 때,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어 외신 카메라에 포착된 병사가 있었다.


어딘가 흡사한 태도가 도청에 남은 시민군들에게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총을 받기만 했을 뿐 쏘지 못했다. 패배할 것을 알면서 왜 남았느냐는 질문에, 살아남은 증언자들은 모두 비슷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 그 도시의 열흘을 생각하면, 죽음에 가까운 린치를 당하던 사람이 힘을 다해 눈을 뜨는 순간이 떠오른다.

입안에 가득 찬 피와 이빨 조각들을 뱉으며,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밀어올려 상대를 마주 보는 순간.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전생의 것 같은 존엄을 기억해내는 순간.

그 순간을  짓부수며 학살이 온다. 고문이 온다. 강제진압이 온다. 밀어붙인다, 짓이긴다, 쓸어버린다.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  <소년이 온다 213쪽>



5.

"아무도 내 동생을 더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써야 합니다" 심장을 누르듯 가슴 왼편에 오른손을  얹고 나는 걷는다. 캄캄한 도로 가운데에서 얼굴들이 어슴프레 빛난다. 살해되는 사람들의 얼굴. 내 가슴에 대검을 박아넣은 살인자의 공허한 얼굴. <소년이 온다 211쪽>


나는 가방을 열었다. 가지고 온 초들을 소년들의 무덤 앞에 차례로 놓았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쪼그려앉아 불을 붙였다. 기도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묵념하지도 않았다. 초들은 느리게 탔다. 소리없이 일렁이며 주황빛 불꽃 속으로 빨려들어 차츰 우묵해졌다.

한쪽 발목이 차가워진 것을 나는 문득 깨달았다. 그의 무덤 앞에 쌓인 눈 더미 속을 여태 디디고 있었던 것이다. <소년이 온다 215쪽>



한강 <소년이 온다 >



_____


어느 한 문장이 파편처럼 내 기억속에 남아서 계속 떠돌고 있었다. 나는 바로 그 페이지를 펼쳤다. 어김없이  메모가 있었다. 다행이었다. 그때 내 생각을 메모해 놓았다는 것이.


이렇게 쓰여 있었다.

'도청에서 항복했기에 광주 시민들이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살아남은 그분들은 어떤 공허에 시달리고 있었다. 고문 후유증도 있겠지만 그때는 어떤 공포와 불안의 사회에서 5·18은 묻혀 있었다'


책을 읽는 와중에 떠오른 느낌을 휘갈겨 써놓은 것이다. 그리고 다음 페이지를 읽었을 것이다.


이 부분이 왜 내내 머릿속에 남아 있던 것일까?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도청에서의 시민군의 마지막 항전은 끝까지 결사항전하는 것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광주시민의 결의를 보여주는 것에 있었다고 보인다. 이 무정부 상태로 빠져든 진공화에서 광주가 벗어날 수 있도록, 즉 그때에 버려진 상태로 있었던 광주를, 국가가 광주를 대한민국에서 제외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기에 도청에 남은 시민군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총을 받기만 했을 뿐 쏘지 못했다"가 성립된다. 시민군은 그 자신들에게 총을 쏘는 군인들과 대치할 뿐 총을 쏘지 않았다. 처음부터 항복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대치상태는 시간을 버는 일이었고, 광주의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행위였다고 보인다.


그런데 계엄군의 수괴와 계엄군은 시민군에게 발포했고, 사람들이 죽었고, 거기에 동호가 있었다. 시민군이 계엄군을 이길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이러한 상징적 싸움을 끝까지 한 이유는,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이며, "전생의 것 같은 존엄을 기억"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에, 죽음은 신체가 부서지는 고통을 향하고 있었고, 살아있는 것은 공허로 가득 찬 부푼 풍선을 가슴 안에 넣은 것처럼 늘 숨이 차서 쉰 소리가 나오는 것 같은 상태라면, 그때의 광주의 모습이라면 ·····

 



시민군의 이러한 의지와는 상관없이, "전두환은, 만에 하나 도청이 함락되지 않을 경우, 전투기를 보내 도시를 폭격하는 수순을 검토하고 있었다"


같은 대한민국의 한 도시에, '함락'이라는 거대한 전쟁 용어를 쓰는 그들은 이미 스스로 대한민국이 아니었다.


문득, 한강의 '흰'에서 중 '흰 도시', 바로 그 도시는 광주이면서 드레스덴일 것이다. 흑백 사진의 흰 도시, 그때의 광주처럼. 실제로는 검은, 공습으로 타서 그을린. 나는 거기에 등장하는 한 남자가 처칠 또는 해리스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전두환일 수도. 두 얼굴을 한 운명의 엇갈림.


나는 "도시를 폭격"할 계획을 하고 있었던   전두환과 신군부의 만행을 시민군 역시 직감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인정사정보지 않고 마구 짓밟고 쓸어버리는 그들의 방식을 시민군들은 눈으로 보았다. 눈앞의 참상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시민이 저항하지 않았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것이다. 흔적 없이 지워졌을 것이다. 시민군이 도청에서 마지막 보루의 항전 형태를 취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더 많은 시민들을 엮어서 죽였을 것이다. 시민군이 총을 쏘지 않고 스스로 항복하여 계엄군의 포로가 되어주지 않았다면, 그들은 다른 제 삼의 포로들을 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민군은 포로로서가 아니라 국민으로서 총을 내려놓은 것이고, 국가도 그렇게 대우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러나 그들은 국가의 운용자들이 아니라 쿠데타의 전신일 뿐이었다. 그것은 비극이었다.



"허락이요? 물론 허락합니다. 대신 잘 써주셔야 합니다. 제대로 써야 합니다. 아무도 내 동생을 더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써주세요"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메모를 이렇게 써 놓았었다.


'노벨상 받았어

아무도 손대지 못해!

이제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으니까!!!!!

한강의 짐을 대신 진 노벨상

아니 같이 들어준 것인지도

광주도'



한강은 "심장을 누르듯 가슴 왼편에 오른손을 얹고 나는 걷는다"라고 썼다. 나는 이 문장에서 한강의 '애도'를 보았다. 그리고  한강의 이미지를 떠올려 보았다. 그 분위기의 의미를 나는 비로소 찾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묵념이 아니라 "경례"의 표식이었다.


그리고 12·3 내란획책에 대한 국민의 선고인 12·14 탄핵가결의 표정과 태도 역시 "경례"의 연속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당당함 속으로 걸어가는 생생함이었다. 살아있음이었다.




나는 책의 맨 마지막에

고마워요 한강!이라 써놓았다.

(내 심정적으로는 나라를 구한 한강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_____


고마워요! 탄핵봉을 밝히는 시민!

이것은 국민 모두의 엄숙함이자 유쾌함의 나아감입니다.

경례와 응원봉의 힘이 만나는 순간! 우리가 전율하는 순간입니다.


____


그리고 한 가지 의문은, 비상계엄령에 대한 권한은 어떻게 제한되어야 할까요? 이 권한이 이토록 악용되고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통제할 방법이 있을까요?


이런 회피기제로서 비상계엄령에 의존하지 않으려면, 역사적 문제인식에 대하여 정면으로 응시해야 한다고 보입니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도 그러한 역사적 문제인식에 대한 정면 응시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회피하지 않는 태도 말입니다.


온전한 자기 머리로 충분히 직시하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이러한 많은 것들에 대하여, 우리는 너무 쉽게 접신이나 영매라는 말에 의존합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들이고 또한 인간의 정신 사유 작동방식은 이원적으로 작동하고 있으니, 모두 머리와 가슴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충분히 자기 안에서 분열되어 있다고 직감하는 것들에 대하여 그것을 응시해 볼 수 있으며, 통합할 수 있다고 보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사유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직접 목도했듯이, 산자가 죽은자를 기억하고 죽은자가 산자를 구하는 역사적 현장은 살아있는 그 자체로서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반복되어 우리 앞에 다른 양상으로 되돌아옵니다. 우리는 우리 머릿속에서 이러한 그림을 충분히 유추해볼수 있고 사유할 수 있습니다.


국회에서 <탄핵 소추안 가결에 대한 제안 설명> 박찬대 의원이 낭독할 때, 그 내용이 목소리로 울려 퍼질 때, 발화되는 그 말들은 전율을 일으켰습니다. 그 엄숙한 경건함은 그대로 "왼쪽 가슴에 손을 얹는 경건함'이었으며, 애도이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삶을 향한 애도였습니다. 과거가 현재를 관통하며 미래로 날갯짓하는 비상의 순간, 어쩌면 삶은 애도의 모든 날들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왼쪽 가슴에 손을 얹는 행위, 심장을 가지고 사는 모든 삶의 나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과거가 현재를 도우려면 현재의 인식이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과거는 우리에게 날갯짓 힘차게 퍼득이며 미래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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